사이렌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는 것 같아 급한 대로 근처 밭으로 뛰어들었다. 이때쯤이면 이북에서는 가을갈이가 끝날 철이다. 길옆에 쌓아둔 흙더미 때문에 양발이 그대로 흙속에 푹 빠져 버렸다. 얼마쯤 가다보니 아무래도 방향을 잘못 잡은 듯해서 다시 신작로로 돌아왔다. 근처 주막집에서 사람들이 두런두런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달음에 산을 넘었다.
그 부근에 열심한 교우가 살고 있는 것을 알았기에 기억을 더듬어 그 집을 찾아냈다. 몸을 가리기위해 짚단 석단을 가져다 앞에 놓은 다음『여기가 반장 댁 이유』하고 큰소리로 불렀다. 안에서『에이쿠』하는 소리가나더니 어서 사무소에 알리라는 말이 들렸다. 앞 뒤볼 것도 없이『노다두씨면 내말 들으시오. 잘 있소 난갑니다』하고는 그대로 뛰쳐나와 버렸다.
어디로 가야할지를 망설이다가 이번에는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과수원에 살고 있는 본당회장의 아들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먼저 회장집을 찾아가 그의 안내를 받아 산기슭에 있는 과수원으로 갔다. 회장은 방한모를 벗어 씌워주면서『여교우를 시켜서 신부님 옷가지를 싸서 보내 드리겠다』며『잘 숨어계시라』고 신신당부했다. 방안에 들어서자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정신없이 쏟아지는 잠을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한 30분쯤 잤을까 회장아들이 헐레벌떡 올라오더니 신부님이 어제 밤에 노다두씨 집에 들렀던 사실이 마을전체에 퍼졌고 내무서원도 그 일을 알고 있다고 마을의 상황을 전해주었다. 그는 내무서원들이 나를 찾기 위해 집집을 이 잡듯이 뒤지고 심지어는 아궁이속까지 조사하고 있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잠이 한꺼번에 확 달아나면서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칼과 반데기 요기할만한 엿을 조금 얻은 다음 그대로 산으로 올라가 밤새 걸었다. 행선지는 어머니의 대녀가 살고 있는「산동공소」로 정했다. 그곳은 38선과 20리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여러모로 피신하기에는 적절한 곳이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해주 한 신부에게 38선을 넘겨줄 사람을 찾는다는 편지를 보냈다. 평소 같으면 인편으로 몇 번씩 오고가야만할 정도의 거리였지만 이상스럽게도 쉽게 연락이 닿아 한 신부의 답신을 빨리 받았다. 한 신부는 『마침 해주에서 60리 떨어진 곳의 공소회장이 38선을 넘을 예정이니 그에게 도움을 받으라』는 전갈과 함께「자전거」를 한대 보내왔다. 신천을 떠난지 7일째 되는 날이었다.
밤참을 먹고 새벽 5시께 그 집을 나왔다. 해주지서를 피해가기 위해 등 뒤에 솔밭을 이고 지름길로 달리고 있는데 앞으로 15m정도의 내리막길을 만났다. 잠깐 멈춰서는 순간 언덕아래에서 사람들이「왁짜지껄」떠드는 소리와 자동차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왔다. 혹시 해주 서에서 나온 사람들이 아닌가 해서 조심스레 귀를 기울였더니 아니나 다를까「구천우 신부」를 운운하는 모양이 영락없이 나를 잡으러 온 것이었다. 그대로 자전거의 스피드를 바짝 내서 정신없이 달아났다. 얼마를 달렸는지 어느새 하늘에는 음력 정월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랐다. 약속된 장소로 가보니 추야공소 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추야공소 회장은 나의 월남행 길안내를 맡아줄 최 회장 집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 집에서는 38선이 무척 가까왔다. 앞뒤 상황을 볼 때는 하루 빨리 38선을 넘고 싶었으나 최 회장은『오늘은 너무 달이 밝아 못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래서 그날은 거의 월남행을 포기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 2시쯤 달을 에워싸고 구름이 모여들며「달무리」가 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주위가 적당히 컴컴해졌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 회장에게 달려가『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오늘이라도 날 넘겨 달라』고 말했다. 드디어 38선을 넘기로 했다. 나는 첫날 잡혔던 당시 그대로 수단을 입고 있었는데 최 회장은 눈을 피하기 위해 입으라며 누런 겉옷을 건네주었다.
최 회장은 나보다 저만치 앞서 걸으면서 『이 근처에서 혹간 월남하려던 사람들이 잡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제가 잡히더라도 신부님은 가만히 숨어계시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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