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복음화의 터전 감곡본당(옛 장호원본당). 장호원본당으로 더욱 널리 알려진 감곡공동체는 이 땅의 교회가 1백여년의 혹독한 박해를 이겨내고 점차 활기를 띄기 시작할 무렵인 1895년 설립, 지금까지 20명의 성직자와 1백여명의 수도자를 배출, 대표적인 성소의 온상으로 그 위치를 확보해 왔다.
그러나 감곡을 터전으로 성소를 키워온 성직자ㆍ수도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895년 본당 설립후 용소막본당(1903) 옥천본당(1906) 고마리본당(1920) 청주본당(1932) 이천본당(1941) 등 지금까지 29개 본당이 감곡으로부터 분리됐음을 감안해 볼 때 충청북도 지역 출신의 성직자ㆍ수도자 가운데 상당수가 감곡공동체를 모태로 태어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감곡본당이 성소의 샘물로서 끊이지 않고 그 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박해를 무릅쓰고 신앙을 지켜온 옛 선조들의 신앙심 ▲초대 본당주임 가밀로 부이용신부의 성모임과 성체 그리고 조국에 대한 사랑의 정신 ▲본당 차원으로 실시한 교육사업의 영향이라고 입을 모은다.
경기도와 충북의 접경지역인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에 위치한 감곡본당은 일직부터 신학교가 자리잡았던 「부엉골」에서 전교활동을 하던 임 가밀로 부이용 신부가 매산 언덕 기슭의 99간짜리 기와집터를 사들여 성당으로 만들고 1895년 9월17일 초대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시작됐다.
감곡공동체는 이렇게 출발했지만 본당의 뿌리는 이보다 훨씬 전인 1860년대의 부엉골 교우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랑이와 부엉이들만이 사는 곳이라고 해서 부엉골이라 이름 지어진 부엉골 교우촌은 현재의 감곡에서 약 50리가량 떨어져있는데 강원도와 경상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산세가 험한 지리적 여건으로 박해 초기부터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었다.
이런 인연으로 인해 부엉골에는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선교사들의 전교활동도 활발, 1885년에는 가톨릭대학의 전신인 예수성심학교가 설립돼 서울용산으로 이전할 때까지 운영되는 등 1894년 임 가밀로 부이용 신부가 사목활동을 담당했을 때에는 22개 공소에 1천 2백여명의 신자들이 부엉골을 중심으로 살고 있었다.
부엉골 신자들은 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려 모든 것을 버리고 모여들었던 만큼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깊은 신심의 소유자들이었다.
당시 조선교구장 뮤뗄 주교에게 보낸 부이용 신부의 서한에서 보여지듯 부엉골 신자들은 옹기굽기ㆍ화전 생활 등의 궁핍한 생활 여건과 동학혁명ㆍ한일합방 등 수많은 격동의 시기에도 굴하지 않고 대대로 물려받은 신앙을 꿋꿋이 지켜나가는 열성을 가짐으로서 후일 감곡본당이 성소의 온상으로 자랄 수 있는 커다란 밑거름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감곡에서만 5대째로 대를 이어 살고 있다는 염옥동 할아버지(마티아ㆍ71)는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예전 머리를 홀랑 깎이우고 심한 매질을 당하다 죽음을 당해도 결코 신앙을 버리지는 않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면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도 신부님의 말이라면 절대 순명하는 등 엄격하고도 청빈했던 선조들의 숨결이 그대로 이어져 오늘날의 감곡을 지탱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들의 신앙심을 바탕으로 감곡본당이 성소의 온상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빠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93년 이 땅에 나와 1895년 감곡본당의 설립과 더불어 초대 주임으로 부임, 그 후 51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이곳에서 열정적인 사목활동을 전개한 임 가밀로 부이용 신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데 아무런 이견이 없다.
성모님께 대한 지극한 신심으로 유명한 임신부는 부엉골이 지역적으로 전교에 부적당하다고 판단, 보다 폭넓은 전교활동을 위해 현재의 위치에 감곡성당을 건립했다.
감곡성당이 서있는 자리는 원래 임오군란 때 민비가 일시 피난처로 삼았던 민응식의 집이 있던 곳으로 동학란 때 불에 타버려 임신부는 헐값으로 집터를 매입, 성당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또한 임신부는 10만 정보 규모의 성당뒷산을 십자가와 성모상을 세워 성모동산으로 만들고 각종 신심행사를 개최,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이끌면서 감곡전교의 기틀을 잡아 나갔다.
작은 동산 중턱에 서있기 때문에 멀리에서도 금방 눈에 띄는 감곡성당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조그만 종탑을 갖고 있어 이 지방의 명물이 되었다.
종탑에서 울려지는 종소리를 듣고 교우들은 성당으로 모여들었고 하느님의 이름조차 모르던 외교인들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덕을 알려주는데 감곡성당은 진정한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 모든 이들의 상상을 초월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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