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0일 새벽 5시30분.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학 신학부 교정에서는 기상을 알리는 음악이 감미롭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숙사 이방 저방에서 불이 켜질무렵, 신학과 2학년 박문성(마태오ㆍ21세ㆍ청파동본당)군도 습관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어제 밤에 밤 늦게까지 시험공부를 하느라 잠을 설친 탓인지 내려앉았지만 아침 기도시간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잠자리를 빠져나왔다.
같은 방을 쓰고 있는 17명의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침구를 정돈한 박군은 급히 아침 세수를 마치고 성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신학교 입학한지 1년하고도 4개월. 박군은 1학년 때의 긴장과 흥분이 이제는 많이 가라앉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활이 자꾸만「습관적 행위」로 굳어가는 듯한 안타까움도 든다고 한다.
오늘 아침 기도때만 해도 그랬다. 입학초기 선배신학생들의「성무일도」합송(合頌)이 너무 아름다와 하루라도 빨리 배우려고 했던 때가 있었던 반면 모든 것이 익숙해진 지금, 특히 오늘은 단순히 입으로만 성무일도를 바치고 말았다.
피곤한 탓도 있었지만 그동안 생활 반성이 너무 없었던 까닭이라고 박군은 스스로를 탓했다.
박군이 걸어가는 성소의 길은 이렇게 반복되는 생활과 자기반성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것은 그가「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기위해 성소를 지망한 사실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고1 때부터 성소에 뜻을 두고 있었으나 두려움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던 박군이 사제의 길을 택하기로 결정한 것은 고3 초기. 어렸을 때부터 기업가가 돼 돈 많이 벌어보고 싶었던 박군에게는 엄청나게 큰 결단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박봉한ㆍ요아킴ㆍ71세)와 어머니(임명취ㆍ안나ㆍ63세)도『보통 힘든 길이 아닌데 왜 하필 그길로 가려하느냐』고 반대했지만 남모르는 기도와 묵상 속에「사제의 길」을 굳힌 박군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그렇게 해서 신학교에 첫발을 디딘 박군은 밖에서 생각하던 신학교의 모습이 생각과는 무척 다르다는 사실에 저으기 놀랐다.
우선 생활분위기부터 생각과 달랐다. 굉장히 엄하고 딱딱할 것만 같았던 분위기가 자유스럽고 자율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이 오히려 이상하기까지 했다.
또 놀란 것은「시험 감독관」이 없다는 점. 일부러라도 남의 답안지를 보고 싶은 판에 왜 시험감독이 없을까하고 의아해 했지만「진실한 양심」에 큰 가치를 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정신없고 분주하게만 지나가던 1학년 2학기. 문득 박군은 자신의 성소에 대해 작은 혼돈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금 나의 삶이 과연 그분에 이르는 길인가.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 외에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내 생활은 없지 않은가. 내 생활은 이렇게 분주한데 나의 모습은 어디에 갔는가』
매일매일 동료, 또는 선배들과 같은 의문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또 밤늦게 성체 조배실에서「나의 길」을 물으면서, 작은 혼돈을 극복하는 가운데 박군은 어느덧 2학년 1학기 중반을 맞았다. 그리고 4월 30일 오늘「구약입문」과「전례학」시험 때문에 예수님과의 만남도 보류한채 기도 때나 묵상 때나 심지어 식사 때에도 시험만을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오전 시험을 끝내고 벤취에 앉아「나」를 생각하던 박군은 자신을「학사님」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예를 다하던 본당의 어른들, 자식의 앞길을 위해 묵주를 놓지않고 있는 부모님, 언제나 봄이면 밤하늘에 자신의 별을 보내주시는 그분, 그분들 모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강렬히 느꼈다.
축구공만 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축구를 좋아하고 풋나기 학보사 수습기자로 뭔가 필봉을 휘둘러보고 싶은 나.
낙산의 꽃도 무심코 지나치지 않는 나. 잘하는 것 하나없어 무조건 열심히 해야한다고 자처하는 나.
그런「나」를 모두가 보고있는 것이다.
165cm 63kg. 『성소는 자신의 삶속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성소는 신학교에서도 계속 확인되며 사제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고 후배들에게「성소」를 이야기하는 박군은 『하느님은 부족한 사람을 선택하시기에 제가 뽑힌 것입니다』라고 기쁘게 응답한다.
또 시험때문에 보류했던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밤 10시 조용히「명상의 방」문을 열었다.
『예수님 오늘은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너무 묻혀 살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때때로「묻힘」속에서 당신을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약속드립니다. 당신을 찾겠읍니다. 시험이 끝난 이번 토요일 축구시합에서 한골만 넣어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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