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내일이면 늦으리!
나는 1981년 여름에 포투갈 리스본 한 대신학교에 2, 3일 묵은 일이 있다. 그 건물은 그 옛날 왕궁이던 것이다. 참으로 화려한 건물이다. 내외를 두루두루 살펴 보아도.
화려한 의상을 차려입은 인형이 속으로는 텅텅 비어있듯이 그 건물 안에 인적이 귀하였다. 50세 이상 수도자와 성직자들이 왔다갔다 분주하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는 동안에 신학교 성소문제가 나왔다. 이 크나큰 문제점은 사람이 아쉽다는 것이다. 20세 청년 하나만이 귀염을 받고 있다. 성소 지원자로…
그 청년의 말을 들으니 50대와 20대 사이에 세대 차이가 너무 심해서 이 성소를 언제까지나 지켜나갈지 모르겠다는 게다. 교장 신부하고 성소문제를 논하던 차에 한국에 성소는 그 상태가 양호하냐고 물었다. 『양호? 즐거운 비명이어요!』하였더니 그게 무슨 소리냐는 게다. 『서울, 대구, 광주 세 교구대신학교가 장마가 졌다』하니 비가 그렇게 많이 오느냐는 벽창호 같은 얘기다. 그게 아니고 성소가 너무 많아서 자른다고 설명을 하였더니 깜짝 놀라며『그 잘린 성소자들을 비행기로 실어 보내라』는 것이다. 그것은 주교님들 사이에 국제적으로 될 일이니 교섭해보라고 한 일이 어제 같이 되새겨진다.
금년에도 한국 4대 신학교들이 눈물을 머금고 성소를 자르게 된 줄 안다. 그러나 이 현상이 정상적이 아니고 언젠가는 성소 가뭄이 올 것을 각오해야 한다. 벌써 서양바람이 선들선들 불어닥쳐 재학생들도 흔들어보고 사제들도 슬쩍슬쩍 건드려본다. 오늘에 영성사업이 그들 맘에 깊이 뿌리박도록 해야하지 않겠느냐. 우리가 지낸 대신학교 시절은 말하자면 트라피스트수도원 같은 분위기 속에서 12년간 절여져서 옛과 오늘을 비교하면 『저런! 저럴수가?』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 것이 그 번수를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라틴격언에 『Alia tempora alii mores』(시대에 따라 풍속도 달라진다) 한 말대로 이해하여야 하겠다. 우리가 살아온 그런 신학교생활이라면 막말로 지금 신학생대다수가 『못살겠다. 나가보자』하고 보따리 짊어지고 『한양아 잘 있거라! 나는 간다!』할거만 같다는 노파심도 드니 말이다. 늦기 전에 이 세풍에 바람막이를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
내가 사제서품 50주년 금경축을 기해 이런 책을 세상에 내보낸 일이 있다. 어느 사제가 이 책을 들고『아니! 이 영감이 이 지긋지긋한 사제생활을 다시 태어나도 또 한다니 지겨운 소리 그만 하라』고 일러주라는 게다. 그렇게 지겨우면 왜 됐느냐 말이다.
지긋지긋하기 전에 진작 그만둘 것이지…. 이 말을 듣고 난 며칠 묵상에 잠겨봤다.
사람은 누구나 제 갈길을 잠재적으로 나면서 타고 난다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토마토 자라날 땅이 따로있고 사과나무나 감나무가 자라고 결실 맺을 땅이 따로 있는게 아닌가? 우리 성소도 자라날 맘 밭이 각각 따로따로있다고 본다. 이것저것 이리저리 엎치락 뒤치락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는게 아닌가? 성무님이 사제들에게 73년에 주신 메시지가 늘 아쉽다.『사제관의 창문을 꼭 닫아라. 창밖을 내다볼 필요가 없다』하신 것을 내 사제생활의 신조로 삼아왔다. 창밖에 봄동산에 향기 만발한 장미꽃 벌과 나비가 갈마드는 그 아름다운 한 송이 꽃을 듬뿍 꺾다가는 화판아래 숨어있던 가시에 쿡 찔리고 만다는 것이다. 피만 나고 꽃은 땅에 떨어지고 벌과 나비는 훨훨 창공으로 드높이 날아가는게 이 세상 이치일 것이다. 놓이고 보면 마음만 아플 것을…
정말 사제직이 지긋 지긋한가?
나는 지긋 지긋하지 않고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만족하고 평화스럽게 여기고 늘 성모마리아께 사제의 성소를 주신 것을 감사해왔다.
『왜?』중국 격언에『은혜를 받았거든 그것을 생명을 걸고 결초보은(結草報恩)하라』고 했다. 나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55년간 이 성소를 제딴에는 지켜왔다. 그 이유는 뭐냐고요? 내 고조부님이 죽산「잊은터」에서 병인년에 순교하셨기에 순교자의 후손의 티를 내야하지 않느냐 말이다. 그분의 고귀한 피가 묻은 내 성소를 기르고 가꿔야 한다고 늘 여겨왔다. 그리고 내가 1935년 여름 강원도 장전(長箭) 앞 바다에서 해수욕을 할 때 전신에 쥐가 나서 꼴깍 꼴깍할 제 청년들이 어디서 쫓아와 이 생명을 구해줬으니 어찌 이 나약한 몸뚱이 속에 담아주신 성소가 소중하지 않으랴!
제 자랑이 아니다 제 자랑 너무하면 8불출에 들어갈까 걱정이다마는, 대전서 1949년 12월 7일 1백20명 고아들 장작을 사로 무주구천동으로 가다가 자동차 추락사고로 80m에서 내려 굴러서 그야말로 저승인 무주구천동으로 갈뻔했지만 5인이 다 손가락 하나 병신 안되고 오늘 이 원고를 쓰게 해주신 성모님과 데레사 성녀의 은혜를 난 배반할 수 없단 말이여요! 중국명언이 갈수록 내 가슴을 파고 듭니다. 『결초 보은하라』는 그 명언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저 성소들아, 성소의 수호자를 특별히 간택하여 그 생명 다하도록 보호를 받으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 어머님은 한국에서 한 가정에서 형제를 처음 신품성소에 바치시고 어머님 손에서는 85세로 세상을 떠나시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두 아들신부를 위하여 성모님께 기원하시다 숨을 거두셨다. 자식의 도리로 그 모성애를 잊을 수 없다. 두 형제의 모든 어렵고 고된 사제생활에 어머님의 로사리오 기도를 통해 성모님의 가호가 우리를 앞뒤로 수호해 주신 줄을 깊이 느끼며 그 어머니의 사랑을 회상할 때 81세나 된 이 자식 눈에는 가끔 눈물이 핑 돌곤한다. 『이게 뭐냐? 낫살이나 먹은게!』하고 나 스스로를 꾸짖은 때가 그 몇 번이었던가. 어머니의 사랑이 우리 성소의 밑거름이 되는 게 틀림이 없다고 여겨온다. 망신하는 김에 다해버릴까! 일본 아끼다 사정에 대한 내 글을 가톨릭신문에서 세세히 실어주신 것을 늘 감사로이 생각하고 그것으로 한국 신자들이 상식처럼 아끼다의 성모님 사정을 거의 다 알게 되었다.
1979년 5월 26일 권토마스 영주 청년을 대동하고 아끼다 성모님에게 간일이 있다. 그날 오후 4시40분에서 5시10분까지 한없이 흐르는 성모님 눈물을 틸지면으로 닦아드리고 권토마스는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지금도 지고지귀한 보배로 성모님의 그 눈물을 보존하고 있다. 이게 다 주책없는 망신살이 뻗치는 짓인가 생각하다하다 이판사판이다, 망신살 뻗치면 얼마나 뻗치겠는가하고 용기를 내어 이글을 계속 써보자.
마지막 주책을 부려보련다. 1983년 11월 8일 오후 2시20분에서 25분 사이에 아끼다에 순례단을 모시고가서「마리아 동산」에서 로사리오「마리아 동산」에서 로사리오「영광의 신비」를 끝낼 적에 갑자기 흰 구름위에 타원형으로 조금 검은 구름이 끼더니 그 가운데「기적의」성모님(흔히 은사의 성모라고 하는)이 하얗게 옷을 입고 나타나셨다. 김유리아 자매님도 성모님 발치를 봤다. 그래서 나는 이 생명 다하도록 성모님 가호아래 다 늙은이 성소를 마지막까지 지켜가려 하고 있다. 모름지기 후배들의 성소도 성모님 품에 고이 고이 간직하고 시들세라 벌레먹을 세라 간직해가는 길이 제일 안전한 길이고 이 신심으로 우리 성소의 장마를 계속하리라고 굳이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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