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행은 성공했다. 별다른 난관 없이 38선을 무사히 넘을 수 있었다. 산 쪽으로 한 시간 반가량 걸은 후 우뚝 솟아 있는「쇠치 고개산」을 넘어 국군의 병참초소로 찾아들어 갔다.
그들은 처음에 까만 옷을 입은 초라한 몰골의 나를 보고 약간 놀란 듯 했으나 내가 신천본당 신부라는 신분을 밝히자 신천의 소식을 이것저것 물어보며 스스럼없이 대해주었다. 대충 조사를 마친 뒤 새벽 6시 30분경 초소를 나왔다. 어느새 해가 높이 떠서 사방을 따스하게 비추고 있는데 그렇게 마음이 즐겁고 기쁠 수가 없었다. 마치 죽음직전에서 살아난 것 같은 큰 기쁨에 저절로「떼데움 찬가」가 흥얼거려졌고 38선을 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한신부와 교인들의 수고에 깊은 감사를 느꼈다.
최 회장과 나는 이미 최 회장이 나의 짐을 맡겨놓은(나와 월남하기 전 최 회장은 짐을 옮기기 위해 한차례 더 38선을 넘었다) 최영식씨 집으로 가 아침식사를 했다. 신천을 떠난지 어느새 보름이 지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내 소식을 전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최 회장과 작별을 고하고 어른걸음으로 하루거리인「마산」유 신부에게 찾아갔다.
내 몰골이 얼마나 형편없었던지 유 신부는 전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마당에 서서『웬 놈인데 찾아들어왔나』하는 의아한 눈길로 바라볼 뿐이었다. 마산에 관한한 내 기억은 그것뿐이다. 약 12일 정도를 머물렀는데 유 신부를 만난 것 이외에는 밥을 먹었는지 잠을 잤는지 그 어느 것 하나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비몽사몽간에 12일을 지낸 후「가막괴 선창」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갔다. 3차례 조사를 당했는데 나는 그때마다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가톨릭을 잘 모르는 그들에게『인천 답동성당에 물어보라. 서울 명동 노기남 주교에게 물어보면 내가 신부인 것을 알 것』이라고 대답해야했다.
답동에서 하루를 묵고 49년 2월 26일 서울명동으로 올라왔다. 북한신부가 명동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기자들이 찾아오기도 했는데 나는 북한의 동향을 알고 싶어 하는 그들에게『이북에서는 남북통일이 곧 될 것이라고 떠들고 있는데 아마도 전쟁이 곧 일어날 것 같다』라는 얘기를 해주었다.
자유를 찾아 정들었던 신천을 뒤로하고 남쪽으로 찾아 왔지만 서울은 상상외로 냉랭했다. 교회쪽의 아는 사람들을 찾아보았지만 그런 분위기는 비슷했다. 탈출할 때부터 줄곧 입고 있었던 수단이 워낙 낡고 헤져 동창 정루가 신부에게 청을 넣어 새 수단을 한 벌 얻어 입었다. 교구에서는 2~3일후 지금은 없어진 명동성당 옆「성가기숙사」사감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기와집인 성가기숙사는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는 지방출신의 가톨릭학생들이 기숙하는 곳으로 당시에는 약 70~80명 정도가 생활하고 있었다.
당시 학생들로는 나중에 한국유수의 예술가가 된 조각가 김세중ㆍ대구매일신문 가톨릭신문사장인 전달출 신부ㆍ아동문학가 이종현등을 꼽을 수 있다.
그곳에서 1년을 머물고 드디어 1950년 5월 월남 후 첫 사목지로 용산의 삼각지본당에 부임했다. 물론 나의고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신자들을 직접만나 다시 사목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 무엇보다 큰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새 사목지에 대한 설레임이 채 가시기도 전인 정확히 한 달 십여일 만에 다시 6ㆍ25가 발발, 나는 다시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시대의 격류에 휩쓸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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