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의 사람 되심은 백성을 찾아오신 하느님의 방문, 백성 가운데 장막을 치고 거처를 정하신 하느님의 상주(常住)의 절정이다. 이 방문 또는 상주를 실현해주는 것이 계약이다. 그렇다면 강생은 일순간에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부분적 실현을 통하여 준비되어 왔으며 또한 그 실현들은 완전한 강생을 지향해 왔다.
옛 계약의 강생
하느님은 사람들과의 계약을 체결하여 그들과 여러 관계를 심화해오셨다. 인간의 말을 통하여 생각을 표현하시고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행동을 보여주시며 처음에는 천막, 나중에는 성전을 통하여 현존을 드러내 보여주신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부분적 계시가 아니라 생각과 원의를 나타내심으로써 하느님이 백성과 함께 계시고, 나아가 당신을 백성에게 내어주시려는 하느님의 깊은 뜻에서 연유한 것이다.
새 계약의 강생
하느님의 이 자기양도(讓渡)는 백성과 인격관계를 맺는 것으로 차츰 밝혀진다. 『나는 너희 하느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계약의 말씀은 피로써 체결되는데 계약이 선천적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같은 생명, 같은 운명을 함께 나누는 관계임을 드러낸다. 하느님은 백성에게 자신을 양도하고 백성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부부관계, 부자관계로 표현된다)를 맺기를 원하시지만 결정적 순간을 위하여 온전한 자기양도를 연기하며 삼가시는 것 같은 인상을 주신다:인간들을 통하여 세상에 개입하시지만 자신의 초월성을 역설하심으로써 역사와 세상밖에 여전히 머물러 계신다. 온전한 자기양도의 뜻은 표징들과 중재역할들을 통해서만 드러날 뿐이다.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간격이 좁혀지고 인간적 방법을 통해 사람들 가운데 인격적으로 계시려는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 아들의 강생으로 실현될 것이다.
자신을 비우는 행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 단언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게서 출발하여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설명해주는 행위를 현양하고 찬양하기를 원한다.
그 행위란 필립2, 6~8이 표현하듯이 자기낮춤(卑下) 자기비움, 자기포기로서 그 대목은 적극적이고 인격적인 동참을 역설한다. 하느님의「형상」안에 계신 분이 종의 형상을 취하여 인간과 똑 같은 사람이 되신다. 포기(낮춤, 비움)→적응→일치의 과정들이 시사되어 있다:하느님의 조건 안에서 영원히 머무시는 것과 종의 신분을 취하시는 것, 그리고 영원으로부터의 선재와 시간 안에 스스로 들어오시는 것.
하느님의 형성과 종의 모습 사이의 대비는 신적 존재와 인간적 존재 간의 간격을 가리키는데, 이 엄청난 간격을 좁히기 위하여 포기와 하강(下降)이 감행된다. 전혀 다른 조건에 옮아가기 위해「아래로 내려 오신다」이는 영광의 조건을 완강히 거부하는 행위로 묘사되었다:『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하지 않으시고』인격적 결단 뿐 아니라 인격의 가장 심오한 내면과 결부된 인격적 행위이다. 필립비서의 그 대목은 비움을 통한 하강을 결단한 하느님 아들의 자비로운 마음, 위대한 사랑을 강조하려 한다. 이들의 자기낮춤은 그분의 온전한 자기봉헌 및 종의조건에 처해 있는 인간들과의 깊은 연대성을 가리키는 것이며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자비심을 드러낸다.
역사 안에 들어오는 행위
요한 1,14는 강생행위를 영원으로부터 고찰한다. 하느님 말씀의 영원한 존재가 성부와의 관계 및 하느님으로서의 본성에 의해 명확해진다. 이 대목 에서는「있다」(tobe)와「되다」(to be come)즉 영원과 시간 (역사)의 대조가 보인다.
「되다」는 피조계의 존재양상이다:『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1,3). 성자는 자기의 영원한 존재 안에서 모든 피조물의 원인으로서 몸소 생성과정 안에 들어오셨다. 그분에게 있어서「되다」는 역사에의 적극적인 동참을 의미한다. 이 동참이『「살」(肉)이 되다』는 구절로써 표현되었다.
말씀은 근본적으로 인간 존재 안에 부리를 내린다. 「살」은 나약하고 죄 많은 인간조건을 가리킨다.
말씀의 놀라운 비하, 하강을 나타낸다. 말씀은 자유로운 주도권으로써 역사 안에 진입해옴으로써 역사의 무상(無常)을 기꺼이 수락하는데 이는 역사를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말씀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다:『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셨습니다』(로마8,3)죄와 죽음에 속하여 하느님을 반역하는 인간의 운명에 뛰어드셨다. 인간의 죄스런 운명에의 동참은 그분의 세례와 죽은 안에서 극처에 이른다.
말씀과 살의 결합
말씀이 살이 되심으로써 마리아의 태중에서 신성과 인성의 결함이 우선 예수 안에서 또한 동시에 마리아 안에서 신ㆍ인 결합이 이루어진다. 이 이중의 결합이 성부의 주도권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자로 말미암아 삼위일체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일회를 지향한다.
마리아의 몸 안에서 이루어진 신ㆍ인 결합은 역사의 차원에서 하느님과 각인간 사이의 인격적 일치를 지향하고 있다.
강생은 하느님이 인간과 결합하시기 위하여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하강으로서 동참과 일치를 위한 예수의 삶을 시사한다. 『임마누엘』은 동참과 연대성을 뜻하는 이름이며『말씀이 살이 되다』는 표현은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를 드러낸다. 신ㆍ인 사이의 현격한 간격은 좁혀져야 하는데 이는 성자의 비움과 포기의 결단으로 실현 된다
하느님의 내려오심으로 특징지어지는 결정적 방문은 역사와 인간세상에의 동참을 뜻하며 궁극적으로 나약하고 죄 많은 인간과의 일치를 목적으로 한다. 죄인인 인간과의 깊은 유대를 맺고 일치하기위하여 성자는 인간세상으로 내려오셨다. 하느님의 자기 낮춤은 성자의 섬기는 삶에로 이어진다. 『섬김을 받으러온 것이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10,45). 내려오심은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결정적 개입을 실현하는 것인데 이는 죄인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고 이사랑 때문에 성자는 신적 조건에 머물기를 포기하셨다.
그런데 이 강생은 시작에 불과하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까지 지속되어야 할 하느님의 자기낮춤인 것이다. 강생을 통한 인간과의 결함은 빠스카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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