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산 언덕 새 성전을 기반으로 전교의 기틀을 다진 감곡공동체는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투철한 목자정신과 깊은 신앙심으로 많은 양떼들을 이끌었던 임 가밀로 부이용 신부는 1907년 성당 뒷 편에 매괴 국민학교를 설립, 감곡이 성소의 온상으로 깊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설립 당시의 학교는 체계적인 교육과정이나 자격을 갖춘 교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학교라 할 수 없었지만 당시 여건에 비추어 볼 때 매괴국민학교의 탄생은 감곡공동체의 발전에 결정적인 매개체가 됐다.
자금의 부족, 학식있고 헌신적인 교사를 구하기 힘든 점, 아동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부모, 일본인들의 지나친 통제 등의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부이용 신부는 굴하지 않고 1922년에는 2백명 수용규모의 교사를 개축했으며 1936년에는 정식으로 학교 인가를 받고 본격적인 교육 사업을 전개했다.
부이용 신부의 이러한 노력에 의해 매괴학교는 일반교육과 종교교육을 겸한 체계있는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교우 학생들은 물론 외교인 학생들까지 입학하는 등 조금씩 소기의 성과를 거두어 나갔다.
이같은 매괴학교의 종교 교육효과는 감곡본당 출신 사제 대부분이 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잘 입증되고 있다.
매괴학교 출신의 서울 혜화동본당 주임 이상훈 신부는「남녀학생의 등하교 길마저 서로 다르게 꾸며져 있는 등 학교생활은 엄격했지만 학생들은 신부님과 교사들의 가르침에 무조건적인 순종을 보였다」고 회상하면서「학교 교육을 통해 닦여진 신앙은 지금도 사제 생활에 있어 커다란 밑받침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감곡본당이 성소의 못자리로 자랄 수 있었던 매괴 국민학교는 그 후 매괴 상업고등학교에서 매괴 여자 중·상업고등학교로 변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같은 교육의 뿌리는 신자들의 맹목적인 신앙의 자세를 능동적인 신앙의 자세로 승화시켜 자연적으로 성소육성의 밑거름이 됐으며 지역주민들의 문맹퇴치에도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성소계발에 또 다른 힘이 된 것은 국내에서는 최초로 1914년부터 성신강림 대축일에 실시되는 성체 거동 행사를 빼놓을 수 없다.
해방이 되던 해부터 6ㆍ25직후까지의 몇 해를 제외하고는 매년 계속 되어온 성채 거동 행사는 신자 뿐만 아니라 이 지역 부근의 주민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져 지금도「매괴 동산」에 성체 가마가 올라가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는 말이 오갈 정도이다.
감곡본당과는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86m높이의 뒷산「장미의 언덕」은「로사리오 동산」또는「성모님의 동산」으로 불려지고 있으며 동산 맨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세워져있고 중턱에는「성모광장」으로 명명된 8백여평의 넓은 터가 닦여져 있다.
감곡본당 신자들은 이「성모광장」을「기적의 현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제 말기 일본인들은 신사터를 마련키 위해 터를 닦으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뇌성벽력이 공사현장을 덮쳐 끝내 공사를 완공치 못했기 때문이다.
성체거동행사 말고도「로사리오 동산」에는 항상 신자들의 묵주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는 등 창설자 부리용 신부의 성모신심은 오늘에도 그대로 이어져 감곡공동체를 이끌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예전 감곡본당 신자들에게는 잊지 못할 소중한 기억이 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여러분을 사랑했었다」고 말할 정도로 우리나라를 특별히 사랑했던 임가밀로 부이용 신부는 해방이 되자 맨 먼저 성당 제대 밑에 36년 동안 감추어 두었던 태극기를 종탑에 걸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게 했다.
오기선 신부는 1910년 감곡에 있었던 한 사건을「곡예사 같은 인생」이라는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일합병 칙서가 나붙자 감곡성당에서는 눈물겨운「장례식」이 극비밀리에 치러졌다. 구한말에 입국하여 한국과 운명을 같이 해온 임 신부는 태국기를 고이고이 눈물 속에 착착 개어 성당 제대 밑에 감추어 놓았다」
부이용 신부는 태극기를 소중히 간직했고 이후 즐기던 담배도 끊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국땅 한국을 자기 몸처럼 사랑했던 임 가밀로 부이용 신부의 헌신적인 사목활동이 있었기에 오늘의 감곡이 있을 수 있었다고 신자들은 입을 모은다.
1만 여명의 감곡 주민 중 신자가 2천명에 이를 정도로 지역 사회에 깊은 뿌리를 내린 감곡본당은 최근 농촌사회의 급격한 변모로 인해 다소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운영되고 있지만 현재 6명의 신학생이 열심히 성소의 길을 닦는 등 성소의 온상으로써 그 전통과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현 본당주임 장인산 신부는「이곳 출신은 아니지만 유서 깊은 감곡에서 사목활동을 하게 되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면서「임가밀로 부이용 신부를 비로한 역대 주임 신부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깊은 신심을 지닌 신자들의 열성이 한데 어우러져 오늘의 감곡을 탄생시켰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감곡본당 출신 사제는 다음과 같다.
▲정규량(선종) ▲이철연(선종) ▲서상필(선종) ▲서상우(성베네딕또회ㆍ파티마병원 지도) ▲이상훈(서울혜화동 주임) ▲조순창(서울여의도 주임) ▲박병해(가르멜회在 로마) ▲김병철 (청주영운동 주임) ▲경덕수(청주교구ㆍ독일교포사목) ▲이한구(청주 교구 부교구장) ▲박기현(청주교구ㆍ광주가톨릭대) ▲서병섭(인천 화수동 주임) ▲연제식(청주교구 미원 주임) ▲서정혁(청주교구 옥천 주임) ▲이범수(청주교구ㆍ부주주임) ▲송열섭(충주 지현동 주임) ▲박병도(청주교구ㆍ유학) ▲김유철(청주교구 영동본당) ▲김원택(청주 봉명동 주임) ▲안충석(서울아현동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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