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혹독했다면, 중국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921년 공산당이 창당된 후 외국인선교사를 대상으로 무참히 이뤄졌다.
1928년 장지에시(蔣介石)가 난징(南京) 정부를 수립하자 비오 11세 교황이 이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공산당은 천주교를 장지에시파로 간주하고 외국인 선교사와 신자들을 대상으로 박해를 시작했다. 중일전쟁 기간이었던 1937년부터 1945년까지는 항일을 목적으로 공산군으로부터 박해를 받아야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중국 내 반공 게릴라의 활동이 격화됐고, 공산당은 교회 내의 반혁명 인사를 색출하고자 ‘삼자(三自) 운동’를 추진한다. 삼자에 속하는 자치(自治·중국 교회는 자율적으로 다스린다)의 뜻을 따라 애국교회가 형성됐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가 체포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그 실상은 참혹했다. 라오허고우(老河口)교구의 한 신부는 천장에 매달린 채 구타를 당해 목숨을 잃었으며 십자가에 하루 동안 묶여 있다 순교한 신부도 있다고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공산당은 신부와 수녀의 묘를 파헤쳐 고인을 모욕했으며, 성체를 길가에 뿌려 훼손하는 일도 잦았다.
「중공 치하에서 외국인 선교사들 추방과 강제 노동 수용소의 선교사들」은 중국이 공산화되는 과정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희생된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야기다.
서양자 수녀는 40여 년간 홍콩과 대만을 오가며 중국교회 관련 자료를 수집했고,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공산당 창립시기부터 중일전쟁, 일본 패망 후, 공산당 창립 이후까지 30여 년간 이어진 박해의 흔적이 책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박해의 참혹함 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외국인 선교사, 그리고 중국 신자들의 굳은 신앙심이다. 신부들은 목숨이 위험한 가운데서도 애국교회 가입을 거부했으며, 신자들은 고발된 외국인 선교사에 대한 공산당의 추궁에 “죄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모진 박해 속에서 살아남은 중국교회의 기록을 살펴보며 우리나라 교회사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