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은 신약성서 작가들의 지배적 관심사이다(마태11, 27:루가10, 22). 마르코는『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칭호로 서두를 삼으며 바울로는 자기의 선포내용을 요약하여『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이라는 정식으로 표현한다(로마1, 3ㆍ9:2고린1, 19:갈라116). 요한은 예수가 하느님아버지의 아들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성부와의 일치
예수는 하느님을「우리(너희)아버지」(마태6, 9:루가6, 36)가 아니라「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뿐 아니라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아빠」(Abba:갈라4, 6)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이는 예수와 그분의 아버지 되시는 하느님 사이의 독특한 관계 곧 그분과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한 일치 또는 하나 됨을 나타낸다:『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10, 30). 이 사실 위에 하느님의 궁극적 계시자로서의 예수의 신원과 아들로서의 전권(全權)주장이 기초해있다. 그리스도에게서 하느님의 계시가 결정적으로 이루어졌다(히브1, 1이하).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므로 그분 안에서 하느님이 온전히 계시되었다(갈라4, 4이하):『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14, 9). 그리스도의 전권주장은 사람들 앞에서 취하신 그분의 단호한 행동에서 드러난다.
그분의 행동과 말씀은 사람들을 위한 아버지 하느님의 행동과 말씀은 사람들을 위한 아버지 하느님의 행동과 말씀이므로 단호하다.
하느님과 하나이신 아들이므로 그분은 그 어느 것도 자기 마음대로 행하지 않고『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할뿐이다』(요한5, 19)이는 하느님 자신이 아들 안에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는 듯이다.
아들로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그대로 하기위하여 즉 하느님이 아들 안에서 당신 자신의 일을 하실 수 있도록 하기위하여 예수는 그 공간을 마련한다. 이여지가 곧 아버지께 대한 아들의 신뢰, 헌신, 순종이다. 그분은 순종하는 가운데 하느님에게 전적으로 여백(餘白)을 마련해드린다. 온전한 신뢰위에 바탕을 둔 그분의 순종은 그분이 철저히 하느님 아버지에게 속해있음을 생생히 드러낸다. 『예수는 자신의 철저한 순종을 수행하는 바로 그 가운데에 하느님으로부터의 철저한 유래이며 하느님께로의 철저한 귀속이다. 그분은 자신을 근거로 할 때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느님을 근본으로 하고 하느님을 위할 때 모든 것일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는 당신 자신을 몸소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맞아들이기 위한 빈자리이다. 』(Wㆍ카스퍼)
하느님 자신이 순종하는 아들 안에서 이 세상에 오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 하느님의 개업과 구원행위는 예수의 죽음 안에서 절정에 도달하는데 죽음은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극치에 이르른 것이므로 구원의 효과를 낸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해 주셨다』(2고린5, 19)부활로 인하여 예수의 전권주장이 하느님에 의해 확증되었다
순종에 대한 아버지의 보답으로 인하여 다시 살아나신 분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다. 이제 그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 안에서의 자녀(갈라4, 6:로마8, 16)가 될 수 있으며 하느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의 아들이 오셔서 참 하느님을 알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분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2요한5, 20)
성부와 본질 동등함
하느님의 아들 칭호는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 또는 신적본성, 그리고 영원으로부터의 존재 즉 선재적 신성(先在的 神性)을 나타낸다. 그리스도 에는 하느님의 본질이 있으며 그분은 성부와 본질이 동등한 일이다. 하느님의 구원행위가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므로 구원행위를 일으킨다. 그분은 시간 안에서가 아니라 영원으로부터의 아들이므로 옛 계약의 역사 안에 이미 현존하고 활동하였을 뿐 아니라『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8, 18)즉 구원역사 이전부터, 나아가 창조이전부터 계셨다. 창조의 중재자일 뿐 아니라(요한1, 3:골로1, 16~17)창조주와 동일 시 되기도 한다:
『주님, 한 처음 땅을 만드신 이 도 하늘을 손수 만드신 주님이십니다(히브1, 10). 영원한 아들이므로 그분이 역사 안에서 유일회적으로 행한 구원행위가 영원한 효과를 낸다.
하느님 본성의 계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는 것이 하느님의 참 본질, 가장 심오한 실재이다. 그리스도의 하느님은 희랍의 신처럼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온전히 격리되어 있는 신도 아니고, 바라사이파의 신처럼 율법의 세심한 준수에 몰두하는 신도 아니고 중세기의 신처럼 추상적이고 불변하는 우주질서의 보호신(神)도 아니며 계약의 하느님으로서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고 일치하기를 원하는 하느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의 본성을 온전하게 계시 하신다:『우리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주시는 분이다』(신명4, 7참조). 하느님 안에는 폐쇄적이고 고립된 단일성이 아니라 위격들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서로를 개방하고 교류하고 주고받는 하느님이시다. 상호 위격적인 친교의 생병을 누리신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가장 심오한 실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주고받는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 계시된 바는『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4, 8ㆍ16)라는 하느님의 실재 그것이다.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사랑 넘치는 약속은 우리들을 위하여 또 우리 구원을 위하여 성부로부터 성령 안에서 파격되신 성자 안에서 최종적으로 실현되었다. 그것은 영원으로부터 계시는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이 시간 안에서 가져온 결실이다. 예수는 영원한 아들이고 하느님은 영원으로부터 그분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예수의 역사는 하느님의 본질 안에 근거하고 있다.
성자로서의 예수는 하느님을 향해있고, 위하는 존재로 성서에 나타난다. 그분은 자신을 온전하게 비워서 하느님의 실재로 채우려 한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으나 하느님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됨으로써 하느님 안에 온전히 뿌리내리고 있는 분이다. 하느님을 위한 예수의 존재는 그분의 역사 안에서 인간들을 위한 존재 즉 위타(爲他)존재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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