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순교자 신심으로 살아온 동정녀 이용기 할머니(보나ㆍ61)는 9월 순교자성월을 보내는 마음이 남다르다.
『우리는 엄청난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성인 한분만 탄생해도 영광인데 103위 성인을 모셨으니…』북받쳐오르는 듯 말끝을 맺지 못하고 보나 할머니는 눈시울을 적신다.
『이렇게 늙어가면서 주책이라우. 순교자 이야기만 나오면 아직도 눈물이 쏟아지니 말이우』흰머리에 주름살진 얼굴이지만 곱고 단정한 모습이다.
대구에서 순교한 이윤일성인의 묘를 발견한 주인공이기도한 보나 할머니는 돌보는 이 없이 흩어져 있던 무명 순교자들의 묘를 한곳으로 이장시키는 일을 주선하는 등 순교자 유적 개발에 나이 못지 않는 정열을 쏟아왔기에 순교자성월이오면 더욱 가슴 뭉클하다.
전국 유명ㆍ무명 성지는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이다. 용인 골배마실에서 미리내까지 신ㆍ망ㆍ애 삼덕고개를 밤새워 넘으며 순례산 것도 여러 번. 한밤중에 홀로 묵주의 기도를 하며 산길을 걸어가면 전혀 무서움도 느낄 수 없고 힘든 줄도 모른단다. 가냘픈 몸 그 어디에서 이런 용기가 나오는 것일까.
보나 할머니에게 순교자신심이 남다른 이유를 질문하는 것은 어쩌면 우문인지 모른다. 순교자에 대한 일반신자들의 관심이 거의 없었던 시절부터 보나 할머니는 환난과 역경, 죽음의고통속에서도 변치 않는 믿음으로 살았던 순교자의 신심을 그대로 가슴속에 간직, 기도생활, 유적지개발, 성지순례 등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왔기 때문이다.
구태여 그 이유를 찾는다면 구교우 집안에다 어려서부터 순교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란영향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황해도 송림에서 1925년 79위가 복자로 시복 된지 2년 후 태어난 보나 할머니는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면서「천주성교공과」중 복자찬미경을 즐겨 외우곤 했다.
지금도『치명자의 영웅이신 예수여, 너…』서슴없이 읊어진다. 특히『남의 노복이 되어 수 천리 북경원로를 엄동설한에 몇 번이나…』대목에 이르를 때는 너무 감동적이라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6ㆍ25동란 때 월남, 서울 장충동에 정착한 뒤 지금까지 신당동성당에 나가고 있는 보나 할머니는 장충동에서 서울역을 거쳐 새남터까지 혼자 걸어서, 또 절두산, 서소문, 당고개로 순례하곤 했다.
『10ㆍ30년 전만 해도 성지는 거의 버려진 상태였는데 지금은 너무 훌륭해졌어요.
진작 관심을 가졌으면 더 많은 순교자 유해를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보나 할머니는 못내 아쉬운 듯한 표정이다.
본당 청년팀ㆍ어머니팀을 이끌고 성지순례에 자주 나선바 있는 보나 할머니는 특히 김대건신부의 묘가 있는 미리내 성지를 즐겨 찾는다. 그러던 중 1백년 넘는 임자 없는 무덤이 부근공소에 산재해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조상숭배사상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임자 없이 버려진 무덤은 십중팔구 순교자의 무덤인 경우가 많다.
잡초가 우거진 무명 순교자묘를 참배하던 보나 할머니는 이들 묘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고 한곳으로 이장시켜야한다고 결심,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에게 미리내로 순교자묘이장을 청원하고 이를 위한 기금마련에 나섰다. 무명 순교자묘참배 13년만인 76년 가래실공소에서 12분의 무명 순교자묘가 미리내로 이장됐고 이어 묵리공소에서 1명의 순교자가, 손고공소 부근에서 3분의 묘가 각각 이장됐다.
이중 묵리에서 이장한 묘는『대구에서 순교한 분을 이곳으로 이장해왔다』는 구전이 기록상 확인돼 이윤이성인의 묘임을 밝혀냈다.
대구대교구는 86년 말 이윤일 성인의 묘를 대구로 이장했다.
보나 할머니는 84년 2백주년 때 103위 성인이 탄생하던 날, 그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며 감회에 젖는다.
『복자들을 성인품에 올려달라고 매일처럼 기도했는데 그 결과가 이루어지다니, 루가복음 2장에 나오는 시므온이 아기예수를 성전에서 뵙게 됨을 감사한 것처럼 나도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는 생각뿐이었다』며 보니 할머니는 또 눈시울을 적신다.
지금도 조국통일ㆍ세계평화ㆍ공산당회개ㆍ올림픽ㆍ세계성체대회 등을 위해 103위성인 한분 한분께 매일전구하고 있다.
특히 청소년문제를 기도할 때는 성인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유대철과 이바르바라에게 통일을 기원할 때는 북한출신인 유종률과, 우세영 성인에게 전구하고 있다.
또 성직자들을 위해서는 성인은 아니지만 존경하는 최양업 신부ㆍ주문모 신부와, 성 김대건 신부ㆍ프랑스선교사ㆍ성직자들에게 전구하고 있다는 보나 할머니는 교회사를 어느 정도 환하게 알고 있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 기억력도 감퇴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수도성소의 길을 생각한 적도 있으나 내가아니면 부모님을 모실사람이 없어 평생 동정으로 살았다』는 보나 할머니는 돈을 쓸 일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생긴다며 일용할 양식은 역시 하느님께서 주신다고 강조한다.
매일 아침미사로 하루일과를 시작하면서『내 삶의 주관자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며 나는 단지 그분의 심부름꾼일 뿐』이라는 자세로 보나 할머니는 기쁘게 살아가고 있다. 남동생이 성모성심수도회 수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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