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셨습니다』(로마8, 3)성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인간본성의 면모들(인간으로서의 성장과정, 굶주림, 목마름, 희로애락, 죽음 따위)에 비추어 명백한 사실일 뿐 아니라 그분이 인간의 삶을 사시고 사람들의 역사에 참으로 동참하시며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깊이 개입하셨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명확히 한다.『인성에 있어서 완전하다』는 교의적 진술은 신격화된 인간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을 말한다. 하느님은 창조된 실재를 그 고유한 속성을 지니게 함으로써 신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므로 신적 실재와 인간적 실재는 양립될 수 없는 두 원리가 아니다. 또한 신화(神化)와 인간화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인간을 충만히 실현해주는 기초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성의 충만함은 신성의 충만함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I고린8, 6)그분 안에서의 양성의 결합은 인성이 신성으로 말미암아 손상되기는커녕 풍요롭게 되어 신성의 차원에까지 승화됨을 보증해 준다. 그분이 하느님으로서 사람이 되신 것은 인간의 신화를 위함이다. 그분은 인간의 완성인<마지막 아담>이기 때문이다.
죄를 제외하고는
복음서가 그리스도의 죄 없음(無罪性)을 역설하는 주제는 둘이다. 그분이 사탄을 거스려 승리한다는 것과 그분이 실현하는 하느님의 나를 쟁취한다는 것이다. 그분은「하느님의 종」으로서 무죄하지만「많은 이들」을 위하여 목숨을 희생 제물로 바친다. 바울로와 오한의 대비법(對比法)도 예수의 무죄성을 설명한다.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육과 영, 그리고 어둠과 빛, 죽음과 생명, 거짓과 진리들의 대비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경험한 그리스도의 무죄함이야말로 우리를 하느님과 중재시키고 완전케 하는 사명에 결정적 요소이다(히브4, 15:7, 26). 그분은『죄악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분』(요한14, 30참조)으로서 세상과 인간의죄와 죽음을 쳐부수기 위하여 육이 되셨고 자신의 무죄 속에서 승리를 거두어 죄와 죽음을 지배하는 분이 되셨다.
자유인
무죄라는 부정적 개념은 완전한 자유를 시사하는 적극적 의미를 내포한다.『그리스도는 죄를 모르셨다』는 표현은 그분의 선함을, 나아가 완전한 자유를 의미한다. 성서에 의하면 자유와 하느님에의 의존은 양자택일처럼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함께 성장하는 실재들이다. 하느님에 예속될수록 인간의 자유는 보다 신장된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 되게 한다.『죄짓는 사람은 죄의 노예입니다.』(요한8, 34).악의 선택은 자유의 제한이고 파괴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완전한 무죄성은 악으로부터의 해방이고 선을 향한 완전한 지향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죄가 그분이 예외적 인간존재로서 우리와 똑같지 않다는 뜻으로 해설될 수 없다. 참 인간은 죄짓지 않는 자가 아니라 죄에서 자유로운 자이다. 죄란 우리 안에서 인간성을 이루는 구성요소가 아니라 노예근성의 뿌리일 뿐이다. 죄 때문에 인간은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 완전한 자유가 하느님과 인간들을 위한 자유의 포기 즉 순통과 섬김으로써 나타난다. 하느님과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자유로이 내어주는 데에 그분의 무죄 또는 완전한 자유가 표현된다.
은총은 샘
그리스도가 완전히 거룩하며 성부와 온전히 일치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의 적극적 의미이다. 따라서 무죄한 그분의 인간성은 거룩함으로 충만 되어 있으므로 그분의 몸은 은총을 전달해주는 샘이다.『그리스도의 인성 안에는 하느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들어 있습니다』(골로2, 8)「성전」과「성령의 부어지심」, 성서의 이 두 주제가 예수의 몸이 은총의 샘임을 시사해준다. 참되고 유일한 성전인 그리스도의 몸(요한2, 13-22참조)은 하느님의 영광의 거처이며 하느님 현존의 표현 자체이므로 월등히 거룩한 예배 장소이다. 참 성전으로부터 생명의 물 곧 성령이 흘러나온다(요한7, 37-39).성령의 부어지심은 그리스도의 선성(善性)을 전해주는 것이다. 십자가위에 매달리신 예수의 몸(옆구리)에서『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19, 34)곧 하느님의 생명, 은총이 넘쳐흐른다. 바울로에게는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의 몸이 은총의 샘이다. 그분 안에는 신성의 충만함이「육체적」으로 깃들어있다(끌로2, 9).주님은「살아있는 영」「생명을 주는 영」(I고린15)「거룩하게 하는 영」(로마1)이 되시어 우리로 하여금 마치 출애굽의 바위(I고린12, 13:10, 4)처럼 영적으로 사진을 마시게 해주신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중성적 실제 즉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은총, 성령을 솟아나게 해주는 샘이다. 그분이 구체적 인간본성을 취함으로써 온 인류가 성삼위와의 친교의 삶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은총, 인간들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인격화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으로서 쉽사리 하느님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은총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모든 것은 그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요한1, 16참조)신성이 충만한 그분의 인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적인 모든 실재는 신적가치를 지니게 되였다.
지속적인 강생사건
강생이란 하느님이 나자렛 예수의 구체적 인간실재를 취하고 그 안에 침투해 오셨음을 의미할 뿐 아니라 예수가 성삼위의 신적 실재를 지닌 분으로서 인간의 실제 안에 들어오셨음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강생은 하느님 및 인간의 충만한 제시이다. 그분 안에서 인간적 하느님이 누구신지 또한 인간이 무엇인가가 근원에서부터 밝혀진다. 그분은 하느님과 인간을 완전히 수용하기위하여 자신을 철저히 비운 존재이다. 하느님과 인간을 향해 완전히 개방, 된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존재이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신성과 일치 덕분에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완성시킬 수 있게 되었다.
강생은 나자렛 예수의 탄생이나 생애에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 나아가 우주창조 및 세상종말과도 연결된 지속적 사건이다. 우리의 제약과 나약한 조건에 깊이 동참한 나자렛 예수 안에 감추어있던 강생의 신비가 부활로써 확실히 드러났으며, 부활은 강생하신 성자가 창조의 원리이고 완성임을 확증해보였다. 부활과의 연관으로 인해 강생은 보편적 우주적 전망을 지니게 되였다. 강생은 창조로부터 종말에 이르는 긴 과정이며 로고스의 사람 되심은 강생의 풍만한 구현이고 부활은 강생신비의 충만한 계시이며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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