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를 겸한 구라파여행은 나의 소원중의 하나였는데 금년여름 드디어 그 꿈이 이루어졌다. 즉 가톨릭신문사가 주최한「제14차 성지 순례단」의 일원이 됨으로서 그 소원이 달성되었기 때문이다.
7월 18일 서울을 떠나 8월 13일에 귀국한 이번여정은 비록 코끼리 다리 만지기이기는 하였으나 결코 잊을 수 없는 뜻 깊은 여행이었으며 돌아 온지 이미 2주가 지난 오늘도 마음은 아직도 루르드의 동굴(洞屈)앞을, 파티마의 촌마을을 그리고 미사 때는 꼭 중세(中世)구라파의 대성당 안을 헤매고 있다.
또한 예루살렘의 비아ㆍ도로로사, 올리브동산, 가도 가도 끝없는 이스라엘의 황야(荒野), 양떼들, 그곳의 뜨거운 햇빛이 마치 어제의 일같이 생생하다.
7월 19일의 런던시내 관광부터 시작된 이번 여행은 독일의 쾰른 대성당(大聖堂)에서 비로소 성지순례의 체모를 갖춘 듯싶었다. 라인 강을 바라보며 하늘을 찌르듯이 솟아있는 쾰른의 대성당은 작은 체구의 동양인 순례자들 앞에 구라파성당의 첫 선을 보여주면서 그 위용(威容)을 과시하는듯하였다. 고딕 양식의 대표적인 건조물인 이 대성당의 외부는 전체가 불에 꺼을린 듯 흑회색(黑灰色)이었으나 제잔(祭壇)장식의 훌륭함과「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목상(木像)등의 미술품으로 내부는 화려하였다.
오색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신구약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었고 수개의 제단이 한 성당 내에 만들어져 제작기의제단에서 미사를 거행하고 있었다. 명동성당은 그중의 하나보다도 더 간소하고 적어 보였으며 새삼 본고장 성당의 웅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이룩해 놓은 것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으며 이러한 놀라움은 그 후 프랑스ㆍ스페인ㆍ이태리 등에서도 여전하였다.
거대한 것을 만들어 낸 중세의 구라파인들. 순정신적(純精神的)인 모뉴 멘트를 위해 경제력과 노력과 정신력의 대부분을 소비한 그 꿈 많은 시대가 물결쳐와 나를 짓누르는 듯하였다. 기공에서준공까지 수백년이 걸렸다는 이 성당은 아직도 그 일부를 보수 중이며 돌일 가톨릭의 중심적 존재이다. 이곳은 처음이었던 만큼 어느 곳 보다도 내 망막(網膜)에 생생히 남아있다.
7월 23일, 파리교민인 국악가(國樂家)변레오씨의 안내로 카타리나 성녀의 기적의 성당부터 시작, 노틀담성당, 외방선교회, 몽마르트 언덕의 성심성당, 그리고 소화 데레사의 기념성당ㆍ생가 등을 순례하였다. 그곳의 대성당들의 웅대함과 예술적인 인상 때문에 감탄과 감격이 연속 되었다.
파리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일행은 야간열차에 몸을 싣고 루르드로 향했다. 6인용 침대차에 자신의 트렁크, 선물보따리 등과 함께 인간 짐짝으로 화한 우리였으나 모두가 기대에 부풀어 근 10시간의 야간여행이었으나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 7시가 넘어서 드디어 무사히 루르드에 도착하였으나 계속 꿈꾸는 것만 같았다 루르드! 가톨릭 신자치고 이곳을 동경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바로 그 곳에 온 것이다.
루르드는 조용한 마을은 아니었다. 순례자ㆍ관광객들로 역전은 붐볐고 거리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그러나 아침하늘은 높고 푸르렀으며 화사한 햇살이 눈부셨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한줄기 청순(淸純)함이 중부치레네 산록(山麓)의 이 남불(南佛)의 촌마을을 감싸 주고 있었다.
벨라뎃다에게 발현하신 성모님의 기적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생략하더라도 이곳 땅을 내 발로 직접 밟고 그 동굴 앞에 섰을 때의 신비감(神秘感)에 관해서는 꼭 기술(記述)하고 싶다. 우선 나는 웅대하게도 솟아있는 그 동굴이 있는 거대한 바위에 놀랬다. 그곳에 모신 성모님의 동상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으나 거암(巨岩)의 동굴이 지니고 있는 침묵은 루르드의 지적을 충분히 대변하는 듯하였다.
동굴 앞 길 건너에 새파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1858년 2월 18일 목요일에 흐르고 있었던 바로 그 시내였으며 오늘까지 한 번도 마른 적이 없다고 한다. 시냇물이며, 동굴이 자아내는 그 일대 자연의 아름다움은 또한 장엄하였으며 경치도 절경(絶景)이었다. 침수(侵水)를 하러 휠체어를 타고 온 환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동굴의 영천(靈泉)을 갈구하며 계속 모여들었다.
그들과 순례단 그리고 관광객들로 동굴 앞은 마치 시장같이 붐비었으나 나는 한여름의 햇빛이 눈부신 그 동굴 앞, 군중들의 소요 속에서 그날의 기적을 분명히 느꼈다. 루르드의 하루는 이상하게도 나 자신의 몸에 대한 걱정과 시간을 잊어버리게 했다. 내가 투숙한 호텔에서 그곳까지는 내 걸음으로 왕복 약 40분정도 걸렸는데 하루에 무려 네번을 오갔다. 대성당에 침수하기 위해, 성삐오 지하성당 등에…
그러나 역시 마지막 네 번째는 다리가 몹시 아파서 꼭 쓰러질 것만 같았는데도 변레오씨의 열성에 이끌려「어둠의 십자가의 언덕」을 올라갔다가 밤늦게 돌아왔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에게 솟아났을까. 다음날 아침 모닝ㆍ콜에 놀라 깨어 허둥지둥 새벽의 동굴 미사장에 달려갔는데 지각이었다. 새벽미사는 쌀쌀한 냉기(冷氣)속에서 진행되었고 나는 오한(惡寒)에 떨었다. 그러나 미사가 끝나고 나니 오한은 씻은 듯이 가셨다. 기적수(奇跡水)때문에 우리일행의 짐 보따리는 이곳에서 일제히 불어나고 말았다.
다음의 순례지 파타마에 가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를 버스로 횡단 하였다. 바라도리드ㆍ사라망카 등을 거쳐 포루투갈로 들어갔으나 도중의 스페인 농촌의 아름다움도 잊을 수는 없다. 무한히 펼쳐진 밀밭, 스페인 특유의 엷은 타색(茶色)의 소박한 농가들, 양떼, 군무(群無)하는 제비떼들! 성지순례도 잊어버리고 한없이 그 길을 달려가고도 싶었다.
포르투갈에 들어서니 또한 수려한 산과 무성한 나무들이 멀리 스페인의 벌판을 달려온 우리들을 따뜻하게 맞이 해주었다.
파티마는 조용한 시골이었다. 저녁이 다가오고는 있었지만 루르드의 시끄러움은 그곳에는 없었으며 또 다른 청아(淸雅)함이 고요 속에 감돌고 있었다. 새벽미사에 참석코저 어두운 거리를 가는데 수탉이 멀리서 울었다.
몇 년 만에 듣는 닭 우는 소리였던가! 성모님이 목동들에게 발현하셨다는 나무 앞에서 사진들을 찍었는데 알고 보니 그 옆의 야외 미사장 자리라고 하여 배경을 바꾸어 사진을 찍기도 했다. 도미니칸 수녀원장이 우리 일행을 프란치스꼬와 히야친타의 생가로 안내해 주셨다.
그들이 임종한 소박한 나무침대가 그대로 있었다. 우리의 달동네의 판잣집과 착각할 정도의 그들의 생가! 그 가난한 마을에 나타나신 성모마리아! 나는 여러개의 묵주를 그곳에서 샀다. 파티마의 모든 것이 스며있는 파티마의 묵주를 꼭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었으니까. 루치아 수녀의 늙은 조카딸이 우리의 두레박과 똑같은 것으로 기적의 샘의 물을 길어 주었다.
시원하고 감미롭던 그 우물물을 마시면서 우물가에 만발한 흰 들국화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속에 어린 세목 등의 모습을 생각했다. 파티마의 맑은 공기 속에는「로사리오의 기도」가 충만하였고 나도 하늘을 향해 크게 노래 불렀다. 파티마를 떠난 후도 대성당과 광장이, 가난한 마을 사람들이 오랫동안 내마음속을 차지하고 떠나지 않았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