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사건 때문에 체포령이 내린 듯했다. 선 신부는 내게 미사참여 할 생각을 하지 말고 숨어있으라고 당부하며 약현성당 밑에 여전교회장 집으로 안내해주었다.
이튿날 새벽녘쯤 됐을까 몹시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깼다. 뒷 창을 열고 보니 미사 시간인데도 교우들이 성당에 들어가지 못한 채 웅성거리고 서 있었다. 무엇인가 성당 안에 일이 터졌구나 라는 직감이 왔다. 어느새 나가서 소식을 듣고 온 여회장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새벽에 내무서원이 와서 신부님을 알몸으로 쫓아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내무서원이 밤 12시까지 신부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갔는데 갑자기 새벽에 들이닥쳐 그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신자들이 전부 정신이 빠져있는 상태라고 덧붙였다.
그날이 7월 24일 서울시내 성당이 전부 접수당한 날이다.
나는 다시 안국동에 살고 있는 6촌 동생「충식이네 집」으로 피난을 갔다. 방에 들어가서 막 담배한대를 피워 물었을까 또 다시 대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구천우신부가 오지 않았느냐』는 다그치는 소리가 들렸고『우리는 그 신부님의 소식을 모른다. 여기 올 리가 만무하다』는 생질사위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생질사위는 얼굴이 빨개져서 들어오더니『큰일났다. 곧 나가야겠다』며 상황이 급하다고 말했다. 마침 생질사위가 다니고 있던 연합신문 사장집이 적당한 피난처로 떠날 채비를 서두른다는 소식을 듣고 명동성당 근처에 있던 그 집으로 찾아갔다. 부자 집답게 맛있는 음식을 잔뜩 차려주며 나를 환대해주었다.
우리가 피난할 곳은「덕소」였다. 사장부인이 평소에 잘 다녔다는 덕소의「묘석사」를 목적지로 하고 이튿날 출발했다. 생질사위가 서울의 상황을 대략 알아보고 내게 연락을 주기로 했었는데 이튿날 바로「위험하니 들어오지 말라」는 연락이 와서 그대로 덕소행을 강행키로 한 것이었다.
묘석사는 덕소에서도 꽤 높은 산인「구산」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갈 예정이었던 절 앞의 인가에는 이미 손주ㆍ아들ㆍ딸까지 데리고 온 영감님들이 발디딜 틈 없이 들어차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인가는 포기하고 묘석사법당에서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 산 아래에서는 연일 폭음이 들렸고 전쟁이 계속됐지만 이곳은「천혜의 고도」인 듯 그다지 전쟁의 그림자를 느낄 수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나는 장기나 바둑을 즐겼지만 그곳에 머무는 영감님들은 화투밖에 할 줄 몰라서 늘 산으로 올라가 시간을 보냈다. 7~8월의 산은 초목이 우거지고 수풀이 많아 여기저기서 산나물을 실컷 뜯을 수 있었다. 법당에 있는 동안 도토리만 해도 몇 알을 주었다. 9월에는 인가에 방이 나서 그 집으로 이사했다. 주인아주머니는 내가 가져간 도토리로 묵을 쑤어주었다.
UN군이 서울을 탈환한 10월에야 서울로 돌아왔다 근 3개월 만에 감격적인 서울행이었다. 증명서가 있어야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생질아이가 만들어준「허가증」을 가지고 삼각지본당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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