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 해방자
예수의 생활방식은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과 제한을 두지 않는 교제이다. 그분은 사람들을 해방하러 왔는데 자유를 주기위하여 자신이 충만한 자유를 누리는 분으로서의 면모가 생활태도에서 엿보인다. 그분은 참 자유인이고 자유를 주는 분 곧 해방자이다. 자유는 ~로 부터의 자유와 ~을 위한 자유, 즉 소극적이며 적극적인 양면을 갖고 있다.
소박으로부터의 자유
가족관계에 얽매이지 아니하다:친척들에게서의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고(마르6,1~6)그들의 만류에 개의치 않는다(마르3,21ㆍ31).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혈연관계를 초월하므로 예수는 가정으로부터 자유롭다:『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태12,50). 형식주의에 치우친 예식을 신랄히 비난하고 정결예식, 안신일 지상주의, 율법주의에 대한 격렬한 비판은 종교적 전통에 있어서 그분이 누리는 자유에서 나온 태도이다. 사회인습 즉 사회적 압력, 행동규범, 판단기준 앞에서도 자유롭다. 어린이들을 내세워 하늘나라의 단순함을 배우라고 충고하며, 세리와 창녀들이 율법학자를 보다 먼저 그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주장하고 여자 친구들을 가지며 부당한 이혼법규를 지적하면서 남녀평등권을 고수한다. 친구선택에 자유롭고 사회여론과 선입견을 무서워 않는다.
정권을 두려워 않고 정치인들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씀하여 정치권력 앞에서도 자유로움을 보여준다. 정치적 이해타산에 개의치 않고 정치적 해방에의 유혹을 단호히 배격한다. 정치적 메시아를 염원하는 군중의 기대에 응하지 않는다. 세상의 변혁을 초래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지만 폭력행사, 혁명을 배격하여 폭력에서 자유롭다.
각종 예속으로부터의 자유는 세상으로 부터의 도피와 다르고 자유분방한 무 절체 및 감상주의적 무질서와도 다르다. 예수는 금욕주의자도 경건한 유다인도 아니다(마태11,19). 사람들과 어울려 식사하고 혼인잔치의 기쁨을 나눈다. 하늘나라를 선포하지만 고고한 생활을 거부하고 서민들과 친근한 삶을 영위한다. 대중과 가까이 있으면서 그들의 번민과 고통을 익히면서 그들을 도와준다. 남들을 위해 기적을 행하였지만 자기과시, 자기의 욕구충족을 위해서는 한 번도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 예수의 자유는 자기의 명예, 안락, 인기추구와는 무관하다『머리 둘 곳조차 없는』(루가9ㆍ58). 예수는 한곳에 정착 않는 유랑인으로 살았지만 규범 없는 삶이 아니라 남에게 봉사하기 위한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정착지는 없었지만 그 목적이 뚜렷한 삶이었다. 그분의 자유는 죄인의 자유가 아니므로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인간, 세상으로부터 오는 자유가 아니라「다른」세상에 속한 자유이다. 죄에서의 자유는 용서를 베푸는 태도에서, 악의 세력으로 부터의 자유는 악령을 제압하는 능력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전적포기의 자유
자기를 잊고 남을 위하는 생활태도, 생명까지 내놓을 만큼 죽음에 구애받지 않는 태도에서 예수의 자유는 적극적 측면을 드러낸다. 그 자유는 하느님과 사람들을 위한 자유 즉 하느님과 인간에게「예속된」자유이다. 자신으로부터 철두철미하게 자유로운 예수는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온전히 얽매인 분으로 나타난다. 깊은 연대성:세리 창녀ㆍ죄인들ㆍ미소한자 들ㆍ소박한자들ㆍ삶에 지친 자들을 따뜻이 대해주고 그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는다.
종교적으로 죄인으로 낙인찍힌 불경건한 자들, 사회적으로 소외당한 계층의 사람들, 정신적으로 공허를 느끼고 방황하는 자들을 사랑으로 대하며 도와주고 사람들을 위하여 궁핍, 배척, 슬픔, 불행, 고통을 함께 나눈다:『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다』(마태8,17).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예속된 아들 :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자유로이 교제하면서도 특히 소외계층의 비천한 사람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예수의 얽매인 자유는 아버지께서 전적으로 예속되어있는 그분의 존재양식에서 기인된 것이다『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양식이다』(요한4,34:6,38:5,19ㆍ30등 참조). 아버지께서 예속된 아들로서의 완전한 자유이다. 인간과의 깊은 연대 및 아버지에의 예속 안에 있는 예수회 자유는 생명을 기꺼이 바치는 자유 안에서 절정에 이른다:『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사랑하신다. 내가 스스로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요한 10,17-18). 자신을 자유로이 다룰 수 있는 자유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버지에게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자유로 이어진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큰사랑』(요한15,13)안에서 자신을 포기하는 자유가 최고로 나타난다. 그것은『남을 살리면서 자신을 살리지 못하는』(마르15,31)자기를 위한 무능함이다.
철저한 삶
『선생님은 진실한 분으로서…아무도 꺼리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분이십니다』(마태22,16). 권위 있게 가르치고 자유로이 사신 예수는 인간의 여하한 범주 안에 들 수 없는 분이다. 어느 특정시대의 인간이지만 당대의 사람들을 혼란케 하며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인간적 한계를 뛰어넘는 분이다. 경탄ㆍ공포ㆍ불안을 일으키는 그분의 생활양식은 인간의 모든 제약과 범주를 초월하는 그분의 존재에서 연유한 것이다.
삶을 근원에서부터 살았던 분이다. 하느님과 인간에게 봉사하기위해 자기의 자유까지도 포기하고,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여백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철저히 비운 분이다. 그래서 그분 안에 사랑의 이중계명이 일치되어있다(마르12,29-31). 예수의 철저한 삶은 하느님에 대하여는 순종, 사람에 대하여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하느님을 철저히 섬기는 것은 인간에게 철저히 봉사하는 것이다.
철저한 삶은『죽도록』『죽기까지』성실한 삶, 죽음마저 마다하지 않을 만큼 사명에 투철한 삶인데, 이런 삶은 당연히 비극적 최후를 맞게 마련이다. 삶의 근원, 뿌리 안에는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만난다. 이 만남이 예수의 철저한(라틴어 radicalis)는 「뿌리(radix)로부터」란 뜻이다)삶 안에서 드러나고 그 삶의 결과인 죽음 안에서 성취된다. 따라서 그분은 중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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