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군은 여세를 몰아 10월 29일에는 평양을 탈환했다. 그때 나는 삼각지본당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자 노기남 주교는 내게「신천으로 다시 가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이 제안은 정말 눈물 나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공산당에게 잡혔다가 탈출한 사람에게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라니 아무리 상황이 바뀌었어도 인정상으로는 못할 짓이었다. 그러나 주교의 명인만큼 눈물을 흘리면서도 다시 갈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국군이 후퇴하면서 또다시 역전극이 펼쳐졌지만 그때는 절망감 속에서도 어머님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쁨도 샘솟는 것이 전쟁이라는 상황만큼이나 종잡기 힘든 마음이었다.
10윌 25일 신천으로 떠났다. 경향신문사 김철규 신부의 짚차를 타고 평양까지 가서 11월초하룻날 사리원에 도착했다.
사리원 박 신부는 너무 급히 본당으로 가려고 애쓰지 말고 형편을 보아가면서 하라고 충고를 해주었다. 사리원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그러던 중 재령 신원 땅에 사는 친척집에 어머님이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재령을 가려면 해주방향으로 가야만했다.
11월 1일 해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장수산으로 유명한「장수역」을 지나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차가 기우뚱하는 것이「꽝」하는 폭음이 들려왔다. UN군이 폭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허겁지겁 기차에서 내린 승객들은 가까이 있는「조밭」으로 몸을 피했다. 다행히 폭탄은 기차를 빗나가 다른 곳에 터졌지만, 자칫했으면 어머님도 못 만나고 그대로 죽을 뻔 한 상황이었다.
내가 살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신천교우들이 소달구지를 가지고 온 날이 11월 5일. 지금 세상이야 자가용이 최고겠지만 당시 만해도 소달구지는 소박한 신자들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정성이었다. 그 달구지를 타고 너무나 그리운 고향, 다시는 못볼 것 같았던 교우들에게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교우들과의 만남은 지금 생각해도 코끝이 시큰할 만큼 감격적이었다. 교우들은 있는 것 없는 것을 모아 갖가지 음식을 장만해 잔치를 벌여주었고 이튿날에는 멀리 공소에서까지 신자들이 찾아왔다. 신천 읍민들 역시 나를 환영해주었다. 그들은 신천 읍에서 최초의 유치원을 설립하는 등 활발하게 이뤄졌던 10년간의 사목활동을 잊지 않고 있었다. 교우들을 만나 나의 탈출 후 일어났던 뒷얘기들도 들을 수 있었다. UN군이 북진해서 내무서를 뒤지던 중 서류철에서「미화유치원 접수계획서」를 발견했는데 주민들은 내가 일찍 그것을 예견하고 유치원을 폐쇄했던 사실을 상기하고는「천주교는 선견지명 있는 종교」라고 말했었다고 한다.
또 한편에서는「구 신부는 보통사람이 아니다. 귀신같은 사람이다」라는 말도 들려왔다. 잡혀들어 갔나 했더니 어느새 탈출을 했고 38선까지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왔으니 기가 막힌다는 말이었다. 교우들은 나의 탈출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30분쯤 후에 사이렌소리가 요란히 울리자「구 신부님이 탈출하셨구나」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고 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