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과 인간을 위하여 삶을 그 근원에서부터 영위하였던 예수의 생활태도가 그를 죽음에로 몰고 갔다. 그 뿌리로 부터의 삶 즉 철저한 삶은 죽음의「자연적」순간을 앞당긴다. 하느님에게 순종하고 인간에게 봉사하는 사랑의 삶은 항상 죽음을 동반한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권위와 자유로 특징지어지는 예수의 생활방식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불안을 안겨줌으로써 현 체제를「위태롭게」하였다. 그들은 권위와 자유를 완전하게 행사하는 예수를 위험인물로 간주하였다. 예수는 그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축출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렸다. 이와 같이 예수의 삶 자체 안에 이미 죽음의 세력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죽기까지」사명에 충실하였던 예수의 삶이 어쩔 수 없이 혹독한 죽음을 앞당겼다는 점에서 그분의 죽음은「숙명적」이다.
그런데 그분은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사명에 충실하였으며, 더욱이 임박한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기꺼이 수락하면서 죽음에 대항하는 자세를 취하였다는 점에서 그 죽음은 자발적이다. 죽음에 있어서까지 예수의 자유가 엿보인다.
복음서들이 보도하는 예수 자신의 수난예고는 그분이 죽음을 예감하고 죽음에 대해 수차례생각하고 제자들에게 비참한 죽음을 예고하셨을 것임을 시사한다. 그분은 목전에 다가온 죽음 앞에서 번민하고 그 의미를 숙고하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뜻에 비추어 죽음의 의미를 파악하고 나서 죽음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고 준비하였을 것이다. 이리하여 그분은 죽음을 숙명적으로 기다리지 않고 죽음에 대항하여 최후의 결전을 치루는 태도를 가다듬었을 것이다. 수난보도는 죽음을 앞둔 예수의 적극적 태도 즉 죽음에 대해 뚜렷한 의식을 갖고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맞을 태도를 반영한다. 수난예고, 죽음과 관련한 말씀, 예루살렘 입성 및 성전정화, 최후의 만찬 등은 죽음에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수락과 대처를 나타내 보인다.
죽음에 대한 예감
충돌이 빚은 죽음의 음모:예수의 사망은 자연사(死)가 아니라 소송을 받은 뒤 처형되었고 그 소송은 공생활을 심화되어간 충돌의 결과였다. 예언자적처신의 결론이었다. 충돌의 동기는 대략 넷이다:율법의 권위에 대한 도전, 당시 종교의 중심을 바꾸어 놓음, 메시아의 역할을 거부함으로써 유발된 실망과 원한, 사회의 체제와 구조에 대한 침해이다. 예수는 율법을 지키고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조직된 제도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율법을 상대화시켰다. 율법중심, 율법을 준수하는 인간 업적의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 사랑중심에로 종교의 중심을 전환시켰다. 동포의 기대를 함께 나누지 않고 메시아 기대를 저버리는 바람에 백성과 충돌하여 이스라엘의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한 셈이 되었다.
충돌은 삶에의 충실이 초래한 결과:예수가 무턱대고 당국과 군중과 충돌을 일삼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미움과 원한을 사게 된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인간을 위하여 하느님나라를 소신껏 설파하고 그 나라의 실현에 전신 투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결과이다.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을 펴고 인간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취한 불타협의 처신이 충돌을 빚어냈다. 하느님나라의 메시지, 그리고 그 메시지를 철저히 실행한 삶이 초래한 결과이다. 신명(身命)을 다 바쳐 악과 투쟁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투철하였던 삶의 결과이다. 그분이 선포하고 실현하려 했던 하느님나라는 악의 세력을 쳐부수는 것이었으므로 그 세력의 거센 도전을 피할 수 없었다.
죽음에 대한 이해
죽음을 가까이 느낀 예수가 자신이 겪어야할 비극적 종말에 관해 숙고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가까이로는 폭력에 희생당하여 횡사하였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멀리로는 하느님말씀에 충실하였으므로 박해받고 순교당한 예언자들의 비극적 최후를 깊이 생각하였을 것이며 고통받는 의인들의 처지를 재고하였을 것이다.
예언자들의 비참한 운명:『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있겠느냐?』(루가 13, 33). 이 말은 예언자적 처신을 한 예수가 예언자들의 운명을 자신도 겪어야 함을 암시한다. 세례자의 비극적 최후를 목격한 예수가 자기 역시 그 운명의 전철을 밟아야 함을 예상하였을 것이다. 예수는 예언자들의 운명 안에 자기운명이 미리 그려져 있음을 보았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의 선포 직분 때문에 박해를 당하고 예루살렘에서 배척ㆍ추방을 당하였다.
고통 받는 의인:고통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신앙으로 고통을 감내하고 하느님과의 친교를 다진 의인들이 있으며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고통과 죽음을 감수해야 했던 순교자들이 있었다. 예수는 그들을 가리켜 행복을 선언하였다(마태5, 3ㆍ10~12). 그분은 신앙의 모험이 내포하는 모순들, 위험들을 몸소 견디어냈다:『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는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내셨습니다』(히브12, 3).
야훼의 종:고통을 통한 승리자, 대속인물이다. 모든 고통 안에서 하느님이자기를 선택하여 이 고난의 길을 걷도록 하셨음과 마지막에는 보상과 영광을 보게 될 것임을 안다.
하느님은 당신나라를 종의 고통을 통하여 건설하신다(이사50, 4~9). 사람들은 종이 그자신의 죄 때문에 매 맞고 짓밟히고 학대받는다고 여겼지만 그는 그들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는 것이다(53, 4~6). 종이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바치고 이 제물은 많은 사람들에게 속죄와 의화를 가져다준다.
수난예고는 또한 죽음을 앞둔 예수의 신앙과 희망을 방영한다. 그분은 혹독한 죽음을 예감하면서(예언자, 고난 받는 의인)하느님이 죽음의 구렁에서 자신을 구원할 것이며 나아가 그로써 백성을 위한 구원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신앙을 반영한 것이다(야훼의 종).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상황을 간파하면서 그 위기를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희망 안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예수는 단호한 결의로써 예루살렘으로 향한다:『예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었다…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거기에서 사람의아들은…손에 넘어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아들을…마침내 죽일 것이다. 그러나…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르10, 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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