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상봉의 기쁨도 잠시 다시 고향을 떠나 월남길에 올라야만했다. 국군이 평양에서 후퇴했던 것이다. 신천주민들이 나를 위해 베풀어준「3일잔지」끝 날인 11월 8일 평양에 있던 명수사가 와서 평양의 상황을 들려주며 월남하자고 말해주었다.
11월 15일이 되자 연세가 높은 노인네나 길을 못 갈 정도로 약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신천읍 사람전체가 몽땅 피난을 떠났다. 나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70리길을 꼬박 하루를 걸어「미력」에 도착했다. 미력은 재령해주 사리원의 중간쯤 되는데 평안남북도에서 밀려든 피난민들로 거리가 발 디딜틈 없이 꽉차있었다. 그 통에 모시고 나온 어머니까지 잃어버리고 피난대열에 휩쓸려 다녔다. 미력에 사는 교우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이튿날 일찍 어머니를 찾아 다시 피난길에 나섰다.
그때가 11월 16일, 야트막한 산을 넘어가고 있는데 저쪽에서 비행기 3대가 날아오고 있었다. 그러다니 폭격을 시작했다. 1대에 3번씩 폭음이 9번 들렸다. 그때 어머니와 나는 피난대열의 중간쯤 끼여 있었는데 사람들을 따라 산위로 올라가보니 끔찍한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어느 피난민이 끌고 왔던 소인지「대가리」가 없는 소가 길 가운데 버려져 있고 숟가락뭉치가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사방에 피가 튀어있는데 폭격소리가 날 때 거기에 있었던 피난민들의 모습은 하나도 눈에 띠지 않았다. 몽땅 다 죽음을 당한건지 어쩐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신천으로 가는 도중 기차폭격을 받았던 일, 2~3분만 먼저 이 고개에 올라왔으면 내가 어떻게 됐을까하는 생각들이 떠올랐다. 송장이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산사람들이 그냥바람에 날려 버린 것만 같았다. 그 모양을 보고 넋이 쭉 빠져 있는데 피난민들 사이에「다시 집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웅성웅성 일기 시작했다. 처참한 광경에 피난길이 두려워진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거기서 15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여동생 집으로 찾아갔다. 산길을 따라 가는데 군데군데 사람들이 죽어있었고 폭격 맞은데 마다 피가 고여 있었다. 여동생 집에서 한 달 가량 머물고 12월 20일 해주로 갔다. 해주본당에 머물며 12월 23일에는 신자들에게 주일 강론을 하기도 했다. 나는 대부분이 피난민들로 월남행을 강행하느냐 고향으로 돌아가느냐로 고심하고 있는 교우들에게『자신 있게 월남 할 수 있는 사람은 하고 자신이 없는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각자 형편에 따라 처신하라』고 말해주었다.
신천교우들 중에서는 다시 신천으로 돌아간 이들도 많이 나왔다.
해주본당의 김 신부는 개성을 돌아 연안으로 가는 길을 택해 나보다 먼저피난을 떠났는데 출발한지 2~3일후에는 같이 따라 나섰던 신자들이 되돌아오기도 했다. 가다가 길을 제대로 못 찾고 무척 고생만 했다고 했다.
여전히 피난민들 사이에서는 월남행을 두고 논의가 분분한 가운데 나는 성탄을 하루 앞 둔 24일 신천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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