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의 준비
적대자들과의 마지막 충돌유발, 제자들과 함께 나눈 이별의 식사, 하느님에게 바친 마지막 기도 등이 죽음을 준비하는 예수의 행위들이다. 예수가 실현하려 하였던 하느님나라가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이고 생명의 회복이라면 그분의 삶과 깊이 연관된 죽음도 악에 대한 대결과 생명의 승리라는 양면을 지닌다.
성전 정화사건이 악에 대한 정면도전 또는 대결의 양상을 띠고 있다면 최후의 만찬은 죽음이 생명 안에 삼켜질 것임을 시사한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일치 속에서 살았고 그 일치의 구체적 표현으로 자주 기도하였던 예수가 기도로 죽음을 맞이하였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성전정화, 마지막 식사, 기도 따위는 죽음으로부터 불가피한 도전을 받고 있는 숙명적 상황에서 예수가 죽음을 향해 도전하는 적극적 자세를 드러낸다.
성전정화: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예수께서는 성전 뜰 안으로 틀어가 거기서…』 (마르11, 5:루가19, 45~48). 요한사가가 공생활 시초에 발생한 사건으로 묘사하는 데 반하여 공관복음사가들은 말기에 즉 체포와 가까운 시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도하는데 역사적으로 후자가 더 신비성이 있다.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 예루살렘 성전은 정치, 종교 당국의 이권이 깊이 연관되어 있는 곳이며 예수에게는 아버지의 집이다: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내열정이 나를 불사르리이다』(요한2, 17). 아버지의 집 즉 하느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 때문에 예수는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의 처사에 분노를 터뜨린다. 맹목적인 분노의 폭발이 아니라 의도적인 격분의 행위이다.
자신에 대하여 은밀하게 진척되어오던 음모를 폭로함으로써 예수는 정면 도전하며 체포 및 처형의 구실을 마련해 주었다. 「하느님의 모독자」라는 낙인과 죄목대로(마태26, 60~66참조)처신한 것이다. 성전을 더럽힘으로써 실제로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는 자들의 악행을 예수가 폭로하였기 때문에 그들은『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없애버리자고 모의하였다.』(마르11, 17). 이 사건으로써 예수는 자기 처형의 때를 앞당기었다. 이 사건을 통하여 그분은 자기 죽음을 자발적으로 겪는 것이며 죽음의 시기와 장소를 스스로 택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예수 말고 어느 인간이 자기 죽음의 때와 장소를 경정할 수 있는가?
성전정화의 또 다른 숨은 뜻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자발적으로 수락하려는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헌신은 성전에 대한 열정과 직결되어 있음을 예수는 소년시기 때부터 벌써 표명하였다(루가2, 46참조). 성전에 대한 열정 곧 아버지에 대한 애정 때문에 성전을 정화하려 하였고 이 사건이 처형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면 그것은 예수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지고한 표현으로 죽음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임을 나타내는 사건이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 자! 일어나 가자』(요한14,31).
최후의 만찬: 유월절 축제의 분위기에서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송별 식사를 나누며 하느님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자신의 지나온 삶을 마무리하고 다가온 죽음을 대비한다. 자신의 삶과 죽음을 한 예식 안에 묶어 요약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래서식사이면서동시에제사의요소가내포된예식인것이다.
우선 예수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세심한 배려로 제자들을 위하여 마련한식사이다: 『그가 이미 다 마련된 큰 이층 방을 보여줄 터이니 거기에다 준비해 놓아라』(마르14, 16) 「친구」의 배신으로 말미암은 죽음임을 언급하면서 아버지에게 감사의 기도를 바친다. 이별과 죽음의 고통이 짓누르고 있는 상황에서도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아버지와 제자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기도로써 표현한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도 유월절 식사는 해방과 보살핌에 대한 감사의 식사였다.
삶을 요약하고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는 예식으로 묘사되었다. 만찬은 삶에서 죽음에로 넘어가는「길목」에서 거행되었으므로 그 둘을 잇는 교량역할을 한다. 삶이죽음 안에, 죽음이 삶 안에 있음을 나타내는데 그래서 식사이면서 동시에 제사이다. 『받아 먹으라』『받아 마셔라』는 예수의 말씀은 외형상으론 생명을 기르는 식사임을 드러내지만 내용상으론 희생제사이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바치는 몸)이다.』(마르14, 24). 생명의 양육(식사)은 생명의 봉헌(희생, 제사)이 한데 어울려있다.
생명의 참 양육이 생명의 봉헌 즉 희생적 죽음으로써 실현되는 것이라면 제사의 효과 즉 남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효력은 식사를 통하여 전달되는 것이다. 식사는 웃어른(부모)이 아랫사람(자녀)을 위하여 바치는 희생이며 제사는 그 반대로 아랫사람(후손)이 웃어른(조상)에게 바치는 희생이다. 식사는 희생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며 제사는 식사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식사와 제사는 귀중한 것(생명)을 바쳐서 남의생명을 기르고 풍요롭게 해주는 측면에서 긴밀히 결부되어있다. 식사의 희생적 측면을 드러내 주는 것이 제사이고 제사가 생명을 남에게 전해주는 것임을 나타내주는 것이 식사이다.
예수가 벗을 위하여 생명을 바침(희생죽음)으로써 드러나는 지고한 사랑은 한자리에서 함께 나눔(식사)으로써 체험된다. 따라서 만찬은 빠스카(죽음에서 생명에로 건너감)이다. 예수는 식사로써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제자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면서 자기의 죽음이 자신과 제자들을 위한 생명의 사건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제자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생명을 바치는 제사가 남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식사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예식 안에 구체화시킨 것이다.
겟세마니: 제자들의 무관심, 아버지의 침묵 속에서 극심한 고독과 번민을 겪으며 기도한다. 하느님에게 자신의 고독과 고통을 토로하며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일치 속에서 죽음을 겪어야 한 다는 각오를 다진다: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 다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르14,36). 고통과 불안을 하느님께로 향한 신뢰의 기도로써 극복한다.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 속에서 죽으려고 다짐하는 예수는 드디어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일어나 가자』(마르14, 42)아버지의 무거운 침묵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뢰하며 이 신뢰를 통하여 아버지와의 완전한 일치를 체험하였을 것이다. 이 일치의 체험은 죽음을 과감히 받아들이는 용기와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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