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한국 교회를, 세계교회 사상 보기 드물게 스스로 조직됐다는 의미에서「자생교회(自生敎會)」라고 일컫는다.
선교사의 선교 활동없이 한국인 스스로 신앙의 선교 활동없이 한국인 수용한데서 비롯된 말이다. 이와 똑같은 이치의「자생교회」가 한국 교회 안에서도 이루어 졌다는 사실은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날 부산ㆍ경남 지역의 신앙의 모태가 된 언양지방 신앙 공동체가 바로 그것이다.
정확히 말해,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지 6년이 지난 1790년 언양(경남 울주군 소재)에 살던 김재권(새로 밝혀진 이름=김교회)과 오한우가 서울에 사는 오한우의 친척 오석충 대감댁에 가서 정약용 등과 접촉하고 세례를 받아오면서 영남지방의 신앙은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생적 신앙공동체가 탄생한 언양지방은 박해를 거쳐 비약적인 발전을 계속, 청주교구의 감곡ㆍ대전교구의 합덕ㆍ수원교구의 양지 등 한국교회의 간성인 목자들을 대거 배출한 국내 유수의「성소 못자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된다. 그간 이곳에서 배출된 성직자는 명단이 확인된 숫자만해도 30여명에 이른다. 특히 한국교회의「거성」으로 추앙받는 故 서정길 대주교와 前 부산 교구장 최재선 주교도 이곳 출신이다. 수도자 수는 정확히 파악되고 있지 않으나 현재 50여명 이상 도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록 타지방 신자들에 의한 전교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이 지방 사람들이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인 것이지만, 당시 천주교 박해라는 시대적 상황에 의해 감곡ㆍ양지 등에서처럼 언양도 박해를 피해 모여든 신자들이 주축이 돼 신앙 공동체를 형성해 갔다.
1839년 기해 박해대 죽음을 모면키 위해 충청도 지방과 안동ㆍ예천 등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신자들이 처음으로 언양 가월리에 모여들면서 이 지방고의 신앙 공동체는 뿌리를 깊게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족의 박해의 칼날은 쉬 멈추질 않았다. 갈월리 산골에 모여 살던 신자들은 얼마 되지 않아 또 박해(1866년 병인박해)를 입고 뿔뿔이 흩어져 신앙 공동체는 풍전 등화 같은 위기에 처해졌다.
일부교우는 관헌에 체포, 순교하고 나머지는 그곳으로부터 20리 북방에 위치한「살티」를 비롯,
각처로 숨어들어 겨우 신앙의 명맥을 유지했다.
하느님이 축복을 내리신 곳일까. 병인박해로 이 지역에도 도처에 처참한 살륙전이 벌어지면서 많은 교우들이 순교했으나 이 살티만은 무사했다. 포졸들이 마을 근처까지 왔으나 마을이 위치한 지형이 계곡처럼 꺼진 곳이어서 이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삶터」-「살티」로 명명됐다고 한다.
병인박해를 고비로 박해가 수그러들자 이곳을 시발점으로 언양지역 곳곳에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연양은 마침내 경남지역 신앙의 모태가 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백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함없이 10여호의 자그마한 성교촌(聖敎村)을 이루고 있는 이 곳 살티에서만도 최재선 주교를 비롯 5명의 성직자와 3명의 수녀ㆍ5명의 동정녀가 탄생했다.
박해를 모면한 사실도 그렇지만 더욱 신기한 것은 불과 1㎞도 되지 않는 곳에 신라 때 건립된 유서깊은 대사찰인 석남사(石南寺)가 위치해 있어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굳건히 신앙을 지켜왔다는 점이다. 교우들이 일구어온 논과 밭이 모두 석남사사전(寺田)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지역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석남사의 비구니(여승) 등 사이가 좋은편 이라고 현 공소회장 김명관씨(부산 신선본당 주임 김윤근 신부 부친)는 말한다.
1900년 김승연 신부와 김문옥 신부가 말레이지아 페낭서 최초로 서품을 받은 이래 이 지역 출신 사제들은 형제가 많다는 점이 특이하다.
김동언(선종), 김동철 신부(6ㆍ25때 남북)를 비롯 박문선(부산 초량 본당), 박주선 신부(마산 옥봉 본당)와 이종삼(부제품 받고 선종), 이종철 신부(수원가톨릭대 교수)및 김두완 신부(부산석 포본당), 김두윤 부제 등이 형제 성직자이다.
또 성직자들 사이에 대부분 인척 관계 등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는 제2차 바티깐공의회 이전까지만 해도 혼종혼이 허락되지 않아 얼마되지 않은 교우들끼리 결혼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박해시대와 교우수가 얼마되지 않았던 20세게 초엽을 뺀 나머지 60여년 동안 30여명에 이르는 사제와 50명이 상되는 수도자 등의 엄청난 성소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한곳에서 이렇게 많은 성소자가 발생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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