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간 영토 분쟁이 불거질 때마다 언급되는 것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조선전도’(朝鮮全圖)다. 하지만 조선전도는 독도 영유권이 조선에 있었다는 증거 사료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 지역 교회와 관련해 사목적, 교회사적, 문화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 대전교구 이용호 신부(성 김대건 안드레아 탄생 200주년 기념관 건설 추진위원회 위원장)는 10월 12일 대전교구 내포교회사연구소(소장 김성태 신부) 제4회 연구발표회에서 조선전도에 대해 새로 발견된 사실들을 정리하고 미진했던 학술적 연구가 활성화되기를 제안했다. 발표문을 바탕으로 ‘조선전도’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살펴 보고, 그 의미와 과제들을 정리한다.
■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 제작
김대건 신부의 부제 당시 서한과 샤를르 달레(Claude-Charles Dallet)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등에 의하면, ‘조선전도’는 그가 부제품을 받고 입국에 성공한 1845년 1월 15일부터, 스승 리부와 신부에게 2장의 조선지도를 보냈다는 서한을 쓴 4월 7일 사이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故) 최석우 몬시뇰은 1978년 파리국립도서관을 방문해 필름 촬영을 한 후 이를 국내에 소개함으로써 처음 확인했다. 최 몬시뇰은 당시 지도의 하단 공백에 있는 설명과 도서카드에 적힌 입수 경위를 토대로, 이 조선전도가 1846년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 원본을 따라 그린 것이고, 당시 상하이 프랑스 총영사였던 드 몽티니(de Montigny)가 입수해 프랑스로 가져와 1855년 파리국립도서관에 기증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에 따라 최 몬시뇰이 국내에 소개한 지도는 원본이 아니라, 원본이 작성된 이듬해에 원본을 모사한 사본으로 추정된다.
김 신부는 1845년 4월 7일자로 스승 리부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조선전도 제작 사실을 전했다. 조선전도는 한성부서관에 보관된 공식 지도를 참고해 제작됐는데, 선교사들의 입국로 개척을 위해서 산과 강 이름을 빼고 전국의 주요 관부와 병영, 만주 봉황성에서 의주까지 들어오는 도로와 남해안 해로 등을 수록했다.
이후 조선전도는 리델(Felix-Clair Ridel) 주교가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서 입수한 조선해도를 참고로 보완했고, 달레 신부는 교우촌을 첨가하고 프랑스 해군성 지도를 참고해 조선 해안선 일부를 수정해 「한국천주교회사」에 수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