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론 또는 본체론(本體論)적인 신의 의미는 이러하다. 신이란 만민 공통의 개념이란 뜻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류의 시작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누구든지 나름대로의 신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평소 신에 대해 무관심하던 자들도 어떤 위기에 다다를 때『하느님 사람 살려요』라고 외치는 것은 곧 신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호머 오딧세이(Homer Odyssey)에서도 이르기를『모든 백성은 신을 선천적으로 공경한다』고 했고 라띤 문학가 치체로는『세상에는 신에 대한 신념이 없을 정도로 야만, 미개한 민족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신은 만민 공통의 개념
이와 같이 신은 그의 실체로 모든 사람 마음 속에 스며있는 존재이다. 이런 신이 없이 그의 실체의 개념이 모든 사람에게 가득 채워질 수는 없다.
극히 인간적인 상황에서 이야기한다면 인간은 누구나 배우지 않고도, 성장하면 이성(異姓)에 대한 매력을 느낀다. 그리고 이성을 찾고자 한다. 비록 한 남성을 외딴곳에 혼자 버려두었다고 하자! 한 번도 여성을 보지 못했지만 영성의 어떤 점을 느끼고 동경한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발로이다. 이와 같이 신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모든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신을 추구하고 그분에 대한 동경은 반드시 그 이성이 있기 때문이라면 신에 대한 동경도 마찬가지이다.
절대 완벽한 神은 오직 한 분
신은 유일성을 지닌다. 신은 여럿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가장 완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신이 둘이라고 한다면 그 둘은 서로가 구분되는 점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첫째 신이 가진 것을 둘째 신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며 이것은 벌써 그 두 신은 어떤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절대 완벽한 신은 한분이어야 한다.
신은 이 우주와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며 추월적인 존재이다. 신은 그자체가 자존자요 필연유이기 때문이다.
신은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신은 온 우주에 충만된 존재이다. 이것을 신의 편재성(遍在性)이라고 한다. 동시에 신은 시간의 제한이 없는 영원한 존재이다.
신은 절대 완벽한 지능과 의지의 소유자이다. 그의 지능은 모든 진리의 원천이요 기준이다. 그의 의지는 모든 선의 원천이요 기준이다. 신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신은 윤리도덕의 주관자이다. 흔히 말하는 소위「양심」이란 윤리도덕의 기본은 신이 인간에게 심어준 도덕률이다. 신은 선과 악을 심판하는 윤리의 최후 심판관이다. 그래서 칸트(KANT는)는 그가 쓴「순수 이성 비판」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다가「실천 이성 비판」이란 책에서 윤리 도덕률을 논할 땐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말하기를 인간의 윤리도덕이 끝까지 그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사불멸과 신의 심판이 요청된다고 했다. 그것은 신의 최후심판이 없는 윤리도덕은 알맹이 없는 껍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칸트의 말에 우리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신 없는 윤리는 그 의미가 없다. 우리는 왜 선하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질문에 답변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왜 선하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질문에 답변이 있을 수 없다. 선행을 하고 양심을 지키면 세속적으로 출세도 할 수 없고 치부도 할 수 없는데 왜 양심을 지켜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선과 악을 마자막으로 심판하여 선인에게는 상을 주고 악인에게는 벌을 주는 신이 없다면 허울좋게 알맹이 없는 윤리밖에 될 수 없다.
절대적 무신론자는 없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들을 우리는 무신론자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무신론자라고 하고 싶지 않고 반신론자라고 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들이『신은 없다』고 하는데 그들은 누구보다도 신의 존재를 느끼기 때문에 신을 없애보려는 의도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신」을 저항해 보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쟉끄 마리땡도『이 세상에 절대적인 무신론자는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신이 없다면 신이란 말을 끌어낼 필요도 없다. 예컨대『우리 집에 금송아지가 없다』고 한다면 그 집에 금송아지가 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다. 없는 금송아지를 일부러 끌어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신이 없다」「신은 죽었다」하는 소리는 누구보다도「신의 외침」을 가슴 속에서 느끼기 때문에 일어나는 반작용이다.
그런데 소위 무신론의 형태는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이론적인 무신론, 불가지론적인 무신론, 회의론적인 무신론, 윤리적인 무신론, 전투적인 소위 공산주의자들의 무신론, 이단적인 무신론, 예컨대 범신론 또는 이신론(理神論) 등을 열거할 수 있다. 끝으로 비종교인들의 양상을 분석한다.
신의 존재 앞에 경신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종교의 세계로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분석된다.
첫째로 인간의 지나친 교만에서 온다. 소위 인간 중심주의적인 사고 방식에서 인간 이외에 어떤 절대자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작은 교만의 발버둥이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큰 착각인가? 인간의 능력으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다스릴 수 있는가?
두번째는 윤리도덕적인 테두리에서 개방적인 삶을 찾기 위해서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을 믿고 살게 되면 생활의 자유가 없어지고 신의 윤리에 구속되어야 하니까! 이것은 마치 교통질서를 어긴 운전사가 이것을 감독하는 교통순경이 없었으면 하는 심리와도 같다. 신이 있으면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극히 개방적인 윤리 도덕 신앙에서 나온다.
세번째는 신의 문제에 대해서 아예 관심이 없는「神 무관심증」에서 나온다. 신이 있든 없든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무관심적인 생활태도에서, 비종교적인 삶은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