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여러해 전의 일이다. 내가 관계하던 단체의 대학생들이 산골마을 문등리에서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다른 일들이 좀 있어서 함께 가지못하고, 이틀후에 혼자서 이 마을을 찾아갔다.
내가 버스 종점에서 40분이나 걸어서 이 고지대의 산골마을에 도착한 것은 점심때가 조금 지난 한낮이었는데, 학생들은 한창 마을 앞의 길을 다듬고 있었다. 이틀간의 작업으로 온통 그을린 피부, 땀으로 흠뻑 젖은 몸으로 돌을 메고 흙을져 날랐다. 어떤 여학생은 지게를 져서 어깨가 다 벗겨졌다면서 응석 반 자랑 반으로 투정을 부린다.
봉사대 본부는 분교의 교실을 하나 빌어서 쓰고 있었다. 이 오지의 문등분교는 교실이 딱 두 개밖에 없었다. 학생수는 6개학년을 모두 합해서 열둘. 1학년에서 3학년가지 한교실을 쓰고, 4학년ㆍ5학년 6학년이 같이 다른 한교실에서 공부한다고 한다.
취사조에서 마련해 주는 국수를 한그릇 먹고 작업장에 나가서 그들을 도왔다. 나도 농촌출신이라 젊었을땐 농사일을 많이 했다. 그러나, 이제는 힘이 부쳤다. 학생들은 날더러 개울가에 앚아서 시나 한 수 읊어 보라며 말렸지만, 나의 서툰 작업이 그들에게 용기가 될까 싶어서 그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시원한 골바람이 불어올 때쯤엔, 산그리매도 서서히 마을을 덮어 왔다. 우리는 몸을 씻었다. 물이 맑고도 차다.
산골 동네는 빨리 어두워 졌다. 저녁을 먹고나니 20호 미만의 이 작은 동네는 벌써 어둠속에 고즈너기 잠들고 있었다. 전등이 없는 마을이라 그런지 어느 집도 불을 켜지 않는다. 대신 모깃불을 피우는 모양으로 알사한 연기가 바람결에 코끝을 스쳐간다.
대학생들은 오늘의 반성과 내일의 계획을 위해 본부 교실에 둘러 앉아 열심히 토의를 하고 있었다. 그 시간에 나와 분교장 박선생님은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학교마당의 끝에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이 동네의 이장이라는 분이 수박 한 덩이와 한 되자리 소줏병을 들고 찾아왔다. 상점이 없는 이 마을에선 소주 한 병을 사려 해도 40분 거리인 버스 종점까지 가야 한단다.
우리는 오늘 초면인 사이였다. 그러나 몇마디 대화가 오고가자 십년지기처럼 마음의 벽을 걷어낼 수가 있었다. 나도 농촌에서 자랐으므로 농촌이야기에 대해 공감되는 점이 많았다.
박선생님은 이 학교에 부임한지 삼년이라면서 마을 사람들이 가난에 찌들어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픈 일이란다. 그래도 부지런하고 순박한 동민들을 보면、우리 민족은 하느님이 특별히 아끼시는 민족이지 싶은 생각이 든다고 한다.
소줏병을 다 비워갈 무렵에, 대학생들도 일을 마치고 나와서,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기타를 뜯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노래의 가락은 잔잔하면서도 약하지 않고, 즐거우면서도 어지럽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대견스러웠고 믿음직스러웠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 젊은이들의 영혼에 하느님의 축복이 있기를 빌었다.
자정이나 되었을까. 그러나 아무도 시간을 묻지않았다. 바람도 없는데, 이산속처럼 냉각되어 가고 있었다. 춥다고 했더니, 이곳은 지대가 높아서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하다고 박선생님이 설명을 한다.
몇마리의 반디가 머리위로 날아간다. 저 신비로운 형광. 형설지공의 교훈은 오히려 쑥스럽다. 옛날 중국 어느 임금은 새로 지은 궁궐의 뜰에 수십 수레의 반디벌레를 잡아다 흩었다지만、이것은 그런 인간의 욕심이 서리지 않은 자연 그대로 불빛이다.
검은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다. 날이 어두워야 별은 빛난다지만, 에머럴드 가루를 뿌려 놓은들 저리 고우랴. 「땅위의 별을 꽃이라 부르고, 하늘의 꽃을 별이라 부른다」는 싯귀가 과연 명귀이구나 싶다. 그냥 말없이, 티 없는 순수 그대로, 찬란하지도 주목받지도 않으면서 밤에 눈뜬이들에게만 영겁을 두고 쏟아져 내리는 별빛.
나는 내 고향마을에서 별을 헤던 어릴적의 소년이 되어있음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젊은 학생들의 뜨거운 조국애와, 농민들의 순박한 인간성과 별빛의 아름다움과 이런 여러가지가 녹아서 하나되는 가운데 문등리의 밤은 깊어갔다. 싸늘한 골짜기 도랑물 소리에 섞여、밤새 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대구 덕원고등학교 교사
▲작품에「폐스탈로찌 선생 (1)」「에로크왕국」「부활」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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