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儒林)의 도시」진주에서 서쪽으로 약 8㎞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경남 문산지방.
이 문산지방에 빠리 외방전교회 사제들의 힘으로 1905년 건립된 문산본당은 1926년 진주 옥봉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기까지 서부 경남, 거제도 뿐만 아니라 전남 순천ㆍ벌교등지의 97개 공소를 관할, 단연코 경남지방의 신앙의 중심지였다.
서부 경남지역 신앙의 모태로 오늘날 교회발전에 기반을 다져온 문산은 알려진 숫자만 해도지금까지 22명의 성직자와 25명의 수도자를 배출, 성소의 터전을 일궈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앞 남산과 월아산(月牙山) 줄기 사이의 좁은 협도에 부락을 형성한 문산은 옛날부터 진주로 통하는 교통 중심지로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또한 이곳은 역대로 찰방(察訪: 각도의 역참 일을 담당하는 外聯으로서 정보를 수집하고 범죄인의 검문 색출을 담당한 요즈음의 교통순경)이 주둔, 상당수의 안전을 거느리고 있었다.
하급관리에 해당하는 이 안전들은 거의 모두가 이곳 문산출신으로 생활은 불안정하고 가난했다. 그러기에 문산지방에는 양반들이 살턱이 없었으며, 이러한 문산지방의 특수성은 진양군 16개 면 중에 원우(阮宇), 재각(祭閣)이 없는 유일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지역적 특수성과 또한 지형적 위치 즉 진주로 통하는 길목으로서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까닭에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피난한 신자들도 단순한 이방인으로 생각, 별로 눈여겨 관찰하지 않은 점등이 신앙의 싹이 움틀 수 있었던 요인으로 지적된다.
문산지방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것은 1863년이었다.
헌종 5년 기해박해 때 천주교인을 감시하고 탄압하기위한 오가작통법의 제정으로 신자들이 난을 피해 산중에 숨어 살던 중 전라도 달구산에 숨어 전교하던 최누수가 지리산을 넘어 남강(南江)을 따라 문산에 정착함으로써 서부 경남지역에 신앙이 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자들에 대한 탄압과 박해가 극도로 심하여 신앙이 발아하여 꽃을 피우기란 너무도 험난했다.
철종이 승하하고 대원군이 들어서면서 삼천리 조선강산을 순교의 피로 물들인 병인박해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 병인박해의 회오리 바람은 이곳 문산지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진양군 사봉면 무촌리 중촌마을 선비 정서곤과 모친울산 김씨의 외 아들로 태어난 정찬문은 병인박해 때인 1866년 9월 20일 진주 포교에 잡혀 석 달 동안 무서운 고문을 당했다.
함께 잡혀간 모든 사람들이 천주교를 배교, 풀려나왔지만 정찬문은 끝까지 신앙을 지켜 진주 성빡 형장터에서 효수형(목을 베어 높이 장대에 달아놓는 형벌)을 당하니 이곳에 순교의 피를 흘렸다.
또한 함안 미나리골 중인 계급 출신의 구다두는 병인박해 직전리델 이신부의 복사로 거제도에 들어가 전교하다가 돌아와 신주포교에 잡혀 무수한 매를 맞고 귀가하였으나 7일 만에 장독(杖毒)으로 선종하였다.
이들이 뿌려놓은 신앙의 고귀한 피는 헛되지 않고 후손에게 스며들어 차츰 문산지방에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케 하였다.
병인박해를 기점으로 천주교인에 대한 탄압은 어느 정도 줄었지만 이곳 신자들은 제사ㆍ장례 문제 등으로 인해 외교인들과 여전히 마찰을 일으키고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문산본당 전 회장 조홍제씨는『외인들 때문에 조상의 제사는 물론 장례조차도 마을에서 십리가량 떨어진 곳에서 외부의 눈을 피해 천주교 의식으로 지냈으며 미사도 밤중에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검은 천등으로 창문을 가리고 봉헌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문산지방 신자들의 투철한 신앙심은 차츰 뿌리를 내리기 시작, 제(諸)씨 문중의 규수 한명이 신자가 되어 장재실(長在谷)로 시집가서 씨앗을 뿌리니 오늘의 장재 천주교회 초석을 다졌다. 이장재실은 후일진주를 전교하려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교두보가 되었던 것이다.
1866년경 설립됐던 문산공소는 로베르 김신부, 조조 신부, 오 신부, 엄 신부 등의 헌신적인 노력과 신자들의 투철한 신앙심 등으로 인해 급격히 발전되어갔다.
그 후 20년이 채 지나기도 전인 1905년 문산 공소는 경상남도에서 부산ㆍ마산에 이어 세번째로 본당으로 승격, 초대 주임으로 쥴리엥 권 신부가 부임하게 된다.
권 신부는 본당으로 승격된지 2년 후에 서부경남의 복음의 못자리 역할을 담당할 성당자리를 마련키 위해 찰방관서와 아전 관서로 쓰이던 기와집 10여동과 부지 2천 4백여 평을 매입하였다.
이로써 오랜 세월동안 농민들을 중과세로 유린하며 온갖 음모가 꾸며졌던 찰방관서는 성당으로 자리를 잡음으로써 앞으로 교회이 발전은 물론 성소의 못자리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곳으로 변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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