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의 세상은 「모순」「부조리」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움직여지고 있다. 한 개체에게는 선과 악의 내적 투쟁이 있는가하면 사회적인 부조리, 전쟁이란 무서운 세계적인 공포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인간은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데 그 길은 없고 무한한 행복과 사랑을 추구하는데 그 길이 없다.
모순(矛盾)이란 말은 이렇게 생긴 것이다. 그 옛날 어떤 사람이 창을 만들어 선전하기를『내가 만든 창으로 찌르면 어떤 방패라도 다 뚫릴 수 있다』고 하면서 창을 많이 팔았다. 그 다음 그는 이제 방패를 만들어서 선전하기를『내가 만든 이 방패를 사용하면 어떤 창이라도 다 막아 낼 수 있다』고 했다.
옆에서 듣던 한 사람이 『그러면 당신이 만든 창으로 당신이 만든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답변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창 모(矛)자와 방패 순(盾)을 써서 모순이란 말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을 불안과 고통으로 몰고가는 죄악은 어디서 왔으며 여기서 해방되는 길은 없는가! 하는 인간 불행의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죄를 모르는 인간이 모인 사회라면 모든 불안의 요소도 없을 것이다. 도둑이 없고 경찰이 없고 감옥이 없고 문을 잠그는 일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악은 질서의 파괴
철학에서 악을「선의 결함」이라고 규정한다. 선으로 있어야할 것이 어떤 결함으로 그 선의 질서가 깨어질 때 악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악은「질서의 파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주에는 세 가지 종류의 질서가 있다.
따라서 그 세가지 질서가 파괴되는 악의 상황도 세 가지가 있다. 그 질서는 다음과 같다.
1) 자연질서~춘하추동 사계절의 질서,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 오면 단풍이 드는 자연 질서가 있다.
그런데 더워야할 여름에 갑자기 영하의 추운날씨가 되어버리면 모든 농작물들은 얼어 죽어 버린다. 이런 상황을「자연악」, 또는「물리악」이라고 한다. 자연 질서의 파괴는 무서운 자연의 재앙을 가져온다.
2) 형이상학적인 질서~이것은 철학적인 진리의 질서, 추리의 질서를 말한다.「모든 사람은 죽는다. 나도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도 죽는다」하는 진리의 질서를 형이상학적인 질서라고 한다. 여기서「나는 죽지 않는다」고 하는 그릇된 결론을 갖는다면 이것을「형이상학적인악」이라고 한다.
3) 윤리질서~도덕적인 선의 질서이다.「사람은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질서를 무시하고 사람을 살해한다면「살인범」이라는 무서운 죄인이 되어 버린다. 그는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가 여기서 문제로 삼는 것은 율리 질서의 파괴인 윤리악이다. 우리는 왜 마음 속에 죄의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가?
그래서 선행보다 악행을 쉽게 저지르고 마음의 불안을 느껴야 하는가?
인간 사회에 넘치고 있는 죄의 물결은 어디서 온 것인가?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자동차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멎어버린다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이게 왜 이래! 뭐가 고장인가?』한다. 분명히 그 자동차는 정상이 아니고 이상한 요소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엔진의 질서가 잘못되었다고 하자. 그 자동차는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 그것은 질서의 파괴가 되어「자동차의 악」이라는 곤욕을 치러야 한다. 인간 세상에 만연된 윤리적인 죄악이 많다는 것은 분명히 정상이 아니고 뭔가가 잘못된 비정상이다. 가장 큰 윤리질서가 깨어진 상황일 것이다.
神과의 관계정립 우선돼야
인간에게 주어진 윤리질서에 있어서 가장 큰 윤리질서는 하느님과의 관계이다. 하느님과의 관계질서의 파괴, 곧 가장 큰 질서의 파괴로 말미암아 죄가 생겨나게 됐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윤리질서의 파괴를 모든 죄의 근원이라고 해서 이것을 원죄(原罪)라고 한다.
원죄라는 큰 질서의 파괴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는 그 질서의 파괴에서 오는 죄의 홍수 속에서 모순의 주인공들이 되고 말았다.
오늘의 모든 모순은 원죄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의 인간과 오늘의 사회는 본래 있어야했던 그런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뭔가 잘못된 고장난 상황이다.
행복에로 가야할 길이 끊어졌고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그 인간의 욕망이 여지없이 꺾이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의 인간은 구원을 부르짖는다. 원죄로 말미암아 상처가 났기 때문이다. 이 상처를 치료할 의사를 찾고 있다. 원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랑의 길도 놓쳐 버렸다. 길 잃은 방랑아가 된 것이다. 정녕 우리에게 새로운 인간의 길을 제시하고 상처 난 인간을 다시 치유해주는 길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모순된 人間 구하러온 예수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사랑의 길이 막혔다. 이것을 다시 뚫어서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를 다시 불러주시는 구원의 손길이 필요하다. 이 불행한 인간에게 새로운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새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모순과 부조리 속에 헤매는 인간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서 이 지상에 예수 그리스도란 하느님의 아들이 오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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