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가 있던 장연의 강 신부까지 돌아온다고 해서 그를 만나기 위해 아침 일찍 길을 떠났지만 길에는 눈까지 엄청나게 쌓여있어서 그만 신천에 가지 못한 채 날이 저물고 말았다. 신천서 20리 되는 곳이었는데 피난민 50~60명이 모여 있는 공회당에서 밤을 세웠다. 성탄인 이튿날은 구월산에 숨었던 내무서원들이 다시 신천읍으로 돌아간다는 소식과 함께 대포소리가 들려왔다. 12월 26일에는 미력근처 비행기폭격이 있었던 곳에 가보았다.
누가 갖다 놓았는지 누런 색깔의 인민군 바바리코트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얘기 즉 슨 그곳을 지나던 북의 피난민들이 추위 때문에 대부분 그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UN군이 그 복색을 보고 인민군으로 착각해 폭격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문을 들은 뒷사람들은 그 옷을 다 벗어던지고 흰옷을 입은 채 해주로 갔다고 했다.
앞뒤 정황이 심상치 않아 어머님을 모시고 아주 월남하기로 27일 작성을 했다. 어머님을 두고 나 혼자 신천으로 가보았는데 연일 대표소리가 끊이지 않고 내무서원들의 감시가 무서워 성당에도 들리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해주에서 피난을 나올 때는 어머님과 같이 못보고 나와 매제 큰 생질 셋만 먼저 떠났다. 어머님이『남자들이 붙잡히면 큰일이니까 먼저 떠나라』고 독려하신 때문이었다. 우리가 먼저「연안」으로 가고 어머님은 뒤따라 오셨다. 당시만 해도 연안은 38선 이남의 도시였다. 8촌 동생이 이제 안심하시라며 어머님은 노쇠하시니 여기 계시게 하고 혼자 서울로 가시라고 제안했다.
그때는 예상도 하지 못했지만 그것이 어머님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전쟁의 와중에 다시 연안으로 어머님을 찾아뵙지도 못한 채 61년 이북 전역을 휩쓴「괴질」로 그만 어머님은 돌아가시고 말았다.
연안서장은 교우였는데 마치 아버님과도 같이 친절하게 나를 보살펴주셨다. 그분의 주선으로 배를 얻어 타고 인천으로 가게 됐다. 배 삵으로는 벼를 50가마니 주기로 하고 군대표 등 7명이 같이 동승했다. 오전 10시쯤 됐을까 그만 밀물이 들어 목선이 모래밭에서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해질 무렵에야 썰물이 들어 배가 움직였는데 나중에는 폭풍까지 몰아쳐 부득불「영종도」뒷 섬에 사는 사공영감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닻을 내리는데 내리자마자 닻 끈이 끊어져버렸고 배안에 가득한 물을 한참만에야 다 퍼냈다. 바람이 멎도록 기다린 끝에 새벽에야 사공영감의 집으로 들어갔는데 전쟁 중이라서 그런지 섬전체가「무법천지」였다. 그 통에 나와 같이 배를 탔던 생질이 술에 잔뜩 취한 주민들에 의해 주재소로 잡혀가버렸다 밤새 노심초사하다가 조반을 먹고 이튿날 일찍 생질과 함께 그 섬을 떠났다.
서울에 도착, 내가 맡고 있던 용산 삼각지본당을 찾아 들어간 대가 그 유명한「1.4후퇴」전날 밤이였다. 1.4 후퇴 트럭을 타고 부산까지 내려갔다. 원래 계획은 부산에서 잠시 있다가 제주도로 가려는 것이었는데 제주도 가는 배도 없었던 다른 신부들은 이미 다 떠나버려서 그냥 부산에 머물러 있었다. 나 이외에도 노리남 주교와 몇몇 신부들이 같이 남아있었다.
1915년 5월 23일 그날은 내 평생 결코 잊지 못할 날이었다. 사제서품 25주년을 맞은 날이다. 피난민들로 북적대는 어려운 때였지만 주위 신부님들이 25주년을 축하하는 조촐한 잔칫상을 차려주었다. 6ㆍ25사변의 와중에서 맞은 「사제서품 25주년」노 주교와 7~8명의 신부가 같이 있었는데 나는 그만 여러 가지 생각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소신학교 입학ㆍ신천본당시절ㆍ탈출에 이르기까지의 인생역정이 한꺼번에 펼쳐지는데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을 길이 없어서는 노 주교를 붙들고「울고 싶은 대로 마냥」울어버렸다.
그곳에서 여름을 보내고 가을바람이 불어올 때쯤 전쟁 때문에 밀양으로 내려와 있던「소신학교」에 가라는 발령을 받았다. 그곳에서 2년을 있다가 53년 12월 현재 시흥 청계리「하우현본당」으로 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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