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의 처형
먼저 대제관에게 넘겨져 심문을 받고 그다음에 빌라도에게 넘겨졌는데 유다인들은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보다는 예수가 이교인의 손에 죽게 되면 그를 더 이상 예언자로 여길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그들 총독에게 넘겨주었다. (마태23, 27이하). 제1심은 종교재판, 제2심은 정치재판이었다.
두 경우에 다 예수가 결백하다고 주장하였지만 사람들은 그분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하였다. 하느님의 백성과 이교인들, 교권(敎權)과 정권이 단죄하였다.
교권은 예수가 하느님을 모독한 거짓예언자라는 이유로 공소를 제기하였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대로 내버려두면 누구나 그를 믿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곳과 우리백성을 짓밟고 말 것입니다」하고 가야파가 말했다』(요한11, 47~48). 대사제와 원로들의 공동된 심정은 예수가 부추 켜 선동한 백성들의 들뜬 분위기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하느님이 보내신 예언자가 아니고 하느님의 모독자라는 것을 입증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정권은 예수가 로마 점령군에게 도전했다는 죄목으로 기소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독립을 되찾기 위하여 군종들을 선동하려했다는 내용으로 고발하였다. 정치적선동가로 간주되어 처형되었다.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한 줄을 알았지만 유다인들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거짓이 진리를 처형하였다. 「유다인의 왕」명패는 자기를 굴복시킨 유다인들에 대한 총독의 비웃음이고 정치적 이해타산을 노리는 로마의정의가 예수를 처형하였음을 드러낸다.
두유형의 소송을 내포하는 예수에 대한 재판은 배신으로 특징 지워진다. 「배신한다」「넘겨주다」는 희랍어「Paradidomani」에서 나온 동의어이다.
유다스가 예수를 유다인들에게 넘겨준 것과 그들이 로마인들에게 넘겨준 것은 이중의 배신이었다. 예수의 사랑에 대하여 하느님의 백성은 배신으로 응하였다. 백성의 배신, 이 교인들의 거짓이 합세하여 예수의 죽음을 조작하였다:『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1고린15, 3).
예수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고 모든 소송 절차를 거치면서 누가 무슨 고발을 해도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마르14, 60~61). 이사야 53장 7절의 고통 받는 종처럼 고발자 앞에서 그분은 한마디 말도 없이 서있는 채로 오히려 고발자들을 시험하고 그들의 배신과 거짓을 폭로하고 있었다. 예수의 침묵이 그들을 당황하게하고 불안하게 하였으며 심문하고 시험하였다. 이침묵 앞에서 그들은 자신의 고발로 자신들을 단죄하였다. 빌라도는 놀라움에 사로 잡혔는데 그는 진리를 단죄하는 거짓의 죄악을 가야파 일당은 예수를 배신한 죄악을, 심판 받았다. 제자들 역시 스승의 요구에 얼마나 충실하였는지에 대해 심판을 받았다. 예수 앞에 서있는 모든 이들의 죄악을 폭로하는 심판의 침묵이었다. 이 침묵 속에서 예수는 자신을 변호할 수 없었던 또 다른 고통의 처리를 견디어내야 하였다.
겟세마니에서 아버지를 향해 입을 크게 열고난 이후부터 줄곧 지켜온 침묵 속에서 예수는 죽음에 대결할 채비를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고발자 앞에서 굳게 입을 다문 예수의 침묵은 사람들에게는 심판을, 그 자신에게는 시련과 죽음의 용기 있는 수락을 뜻했고 아버지의 침묵에의 동참이기도 하였다.
죽음의 순간
파국:십자가 죽음은 예수에게 실패였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저주받은 자 (갈라3, 13) 스캔들이고 어리석음 (1고린1, 23) 이다. 말씀, 행적, 삶이 사람들에게 철저히 배척당한 실패작이었음이 판명되었다. 제자들에게조차도 환멸을 가져다준 수치스런 사건이었다(루가24, 2참조).
선에 대한 악, 사랑에 대한 미움의 승리였다. 군중은 기뻐 날뛰며 마음껏 조롱하고 모욕 한다:『너는 성전을 헐고 사흘 안에 다시 짓는다더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네 목숨이나 건져보아라』(마르15, 29). 생전에 자신 있게 선언한 말이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남은 살리면서 자기는 못 살리는구나』(마르15, 31). 생명을 되찾게 해줄 만큼 능력 있는 행위가 조소의 구실이 되었다. 남을 위하는 봉사의 삶이 조롱거리가 되었다. 십자가 앞에서 거짓ㆍ모함 등 온갖 악의 세력이 승리를 구가하였다.
하느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르15, 34:시편22, 1참조). 예수는 목숨을 바쳐 가면서까지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였지만 하느님은 입을 다무셨다. 무죄하지만, 더욱이 하느님을 위해 신명을 다 바쳤지만 묵묵히 계시는 하느님의 무정함을 견디어 내야만 하였다. 그분은 유다인으로서 죽음을 겪는다. 유다인에게는 죄가 하느님과의 단절이고, 하느님으로부터의 소외이다.
죄를 범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소외시키며, 따라서 무죄한 의인은 죄악의 가장 심한 대가인 죽음 안에서 하느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을 체험한다. 예수가 체험한 하느님으로 부터의 소외당함은 곧 죄의 결과에 대한 체험이다. 그분은 죽음의 순간에 그 결과를 그 뿌리에서부터 맛보았다.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죄의 결과를 속속들이 체험하는 가운데 예수는 죽음을 겪었다.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 또한 군중의 소란 속에서 예수는 숨을 거둔다. 무력한 자, 헐벗은 자, 사랑에 굶주리는 자, 배신당하고 버림받은 자로 죽어가지만 아버지께 대한 신뢰와 희망, 그리고 제자들과 사람들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표명한다. 무지 때문에 저지른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빌며 아버지의 품 안에 숨을 거둔다. 하느님에 대한 완전한 순종과 인간을 위한 철저한 봉사의 삶이 실패, 무능, 소외 속에서 사라지려 한다. 인간이 겪는 갖가지 불행과 인간이 저지르는 온갖 죄의 견디기 어려운 결과 속에서 죽는다. 그만큼 그분은 인생의 밑바닥에 있어서까지 인간과 깊은 유대 안에서 죽는다. 죄인들 틈에 끼여 세례 받은 그분은 죄인의 우두머리처럼, 가난한 자들 틈바구니에서 태어난 그분은 가장 가난한 자처럼, 자신을 위하여는 한 번도 전능을 행사하지 않은 그분은 철저한 무능력자처럼 죽는다. 죄의 결과의 체험, 가난과 무능과 실패 속에서 죄 많고 무력하며 나약한 인간과 철두철미하게 하나가 되었다. 이 완전한 일치를 위한 가난과 무능 안에서 예수는 자신의 신원을 계시하기를 원하셨다:『이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르15, 39). 은폐, 감추임 속에서의 계시, 드러남이다. 그래서 예수를 알아보는 그리스도 신앙이 필요하다.
예수가 그토록 신뢰와 희망의 뜻을 표명하고 하소연하였건만 하느님은 침묵하셨다. 이 침묵은 방관이나 무관심인가? 아니면 죽음의 고통을 겪는 아들의 고통에의 완전한 동참인가?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가 성령 안에서 아들을 위하여 결정적으로 개입할 순간이 임박하였음을 알리는 징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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