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여인들의 직관과 용기에 감복하는 경우가 있는데, 내가 우리 집안에서 겪은 몇가지 이야기를 펼쳐 보려한다.
첫번째 이야기
지난달 10일 이후 政局이 실로 변전무상하게 돌아가고 있을때 집의 어머님이 크게 편찮으서서 병원에 입원하고 계셨다. 그래서 집안식구들이 돌아가며 병상을 지켰는데 하순으로 접어들던 어느날 병원에서 돌아온 내처가 놀란 낯빛으로『참 어머님 대단한 분이예요』하고 나에게 말을 건냈다. 내가 무슨일이냐고 되묻자 대충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병원에서 어머님을 간호하고 있는데 어느 신문사에서 그곳으로 전화를 걸어 나를 찾으며 시국에 관한 글을 부탁하더라는 것이다. 내 처가 어머님이 위중하셔서 전혀 글을 쓸 형편이 못된다고 대신 내 형편을 전하고
전화를 끊었더니 주무시는줄 알았던 어머님이『웬 전화였냐』고 물으시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화내용을 말씀드렸더니 대뜸하시는 말씀이,『왜 거절을 했어, 쓰게 해야지. 쓰더라도 하고 싶은 말다 쓰라고 해라. 민주화가 멀지않다. 이제 조금만 밀어부치면 된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단다.
노령에다 병이 깊어 몸도 잘 가누지 못하시는 분의 말씀으로는 너무 놀라워서 내처가『어머님, 한달전만해도 애비글 조심하라고 말씀하시더니 이제 무슨 말씀이세요』하고 여줬더니, 『모르는 소리, 요사이는 하루가 한달이다. 왜 한달전 얘기를 들먹이냐. 여기서 머뭇거리면 안돼』하고 처의 말문을 아예 닫아버리셨다는 것이다.
병상에서도 신문은 꼭 보시고 정국 돌아가는데는 계속 관심을 보이시더니 한치 앞을 못보는 이른바「안개정국」을 꿰뚫어 보셨던 모양이다. 며칠후 이른바「노태우선언」이 나오자, 우리 가족들은 어머님의 선견지명에 다시 한번 놀랐다.
두번째 이야기
작년 봄 시국에 관한 제1차 교수서명이 있을때의 이야기다. 고대 교수들의 서명소식을 듣고 내 처와 의견을 나눴다.
『아마 연대에서도 곧 이야기가 있을거야』하고 내가 말문을 열자, 아내는 『그래서요』하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어째 반응이 도전적이다 싶어,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나도 해야될 것 같애』하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랬더니『아니, 그럼 서명 안하실 생각을 했어요? 밤낮 민주화가 어떻고 하며 글을 쓰면서, 무얼 주저해요』한다. 내가 용기를 되찾아서『만약 학교에서 쫓겨나도 딴소리하면 안돼』하고 못을 박았더니,『당신 학교 그만두면 제가 나서죠. 애들 다컸는데 먹는 걱정을 왜 해요』한다. 대답이 하도 당차서 나는 말문을 닫았다. 본전도 못찾겠기에 말이다.
세번째 이야기
작년에 김일성이가 죽었다고 크게 소동이 났을때 일이다. 집안일로 어디에 갔다 저녁에나 돌아 온다던 아내가 점심 무렵 돌아왔다. 집에 있던 내가 왜 일찍 왔냐고 묻자 별 대답없이 얼버무렸다.
그리곤 내방에서 책을 보는데 두어차례 분명 내게 온듯한 잔화를 내처가 받아 적당히 끊어 버리는것이 아닌가. 내가 의아해서 마루로 나와,「왜 멀쩡히 집에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바꾸지않아」하고 화를 냈더니, 「그럴만한 전화였어요」하고 간단히 대답해버렸다. 내심 불쾌했지만 더 따지지 않았다.
그 다음날, 죽었다던 김일성가 되살아나자 아내가 의기양양해서 내게 그전날의 경위를 털어 놓았다.
밖에 나가서 생각하니,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김일성이 죽은 것에 대한 논평이나 좌담을 요청하는 전화가 집으로 옴직 했다는 것이다. 김의 生死가 不明한 시점에서 거절못하는 내가 뭐안다고 몇마디 했다가 분명 망신을 당할듯해서, 일찍 돌아와 예의 전화들을 끊었다는 것이다. 여자가 당차기는.
네번째 이야기
언젠가 어머님이 가난한 선비집안인 아버님께 시집을와서 고생하시던 말씀끝에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말씀을 하셨다.
『그때 아버지 고향마을 사람들이 꽤나 가난했는데, 서로간에 불화가 잦았지. 다툼이 많았거든, 그래서 내가 훗날 성당에 다니면서 너를 낳은후 하느님께 열심히 기구한게 무언지 아니. 네가 나중에 커서 착한 신부가 돼서 고향에 작은 교회늘 맡아 온 동네 사람들을 하느님자녀로 교화시켰으면 하는 바램이었어. 』
나는 꽤나 놀랬다. 4대가 함께 사는 전통적인 유교집안에서 혼자만 성당에 나가시기도 힘겨워셨을 텐데 언감생심 3대독자인나를 신부로 키울 꿈을 가지셨었다.
그러면서 나는 언젠가 내가 젊었을대 어머님이 하셨던 말씀이 기억났다.
『네가 신부님 옷을 입으면 얼마나 보기 좋을까』
이 간절한 바램은 성사되지 못했으나, 어머님의 정성어린 기구로 훗날 증조할아버지 이하 꽤나 버티셨던 우리 아버님까지 온가족이 하느님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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