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말론적 계시
초기교회는『예수가 부활하셨다』라고 선언하지 않고『하느님이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라고 선포하였다. 예수가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나셨다 라는 뜻이 부활개념에는 표함 되어 있지 않다. 부활의 개념들은 자동사가 아니라 타동사 (일으키다, 깨어나게 하다)이다. 하느님이 예수를 다시 살리셨으므로(타동사) 예수는 살아 계신다(자동사) 라는 것이 초기 부활선포의 주요내용이다. 부활은 하느님의 행위로서 하느님의 종말론적 계시이다. 그것은 이미 예언자들, 예수 자신에 의해 예언된 바가 실현된 사건이다 (루까 24, 5-7:24, 25-26:마태오 28, 6). 『성서에 기록된 대로』라는 말은 하느님이 계획ㆍ약속하셨던 바가 실현된 사건임을 표현한다.
예수도 부활에 관한 논쟁 중에 성조들의 하느님 곧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근거로 하여 부활신앙의 타당성을 입증하였다 (마르12, 26?27). 부활로써 계시된 하느님은『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지혜11, 26) 이며 슬픔, 고통,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원하는 분이다 (시편68, 21). 생명의 근원인 하느님은 죽음에서부터 생명이 솟아나게 할 수 있고 (로마4, 17), 죽음에서 죽은 이들을 자유롭게 하는 분(2고린1, 9)이다. 아들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하느님은 당신이 그 아들의 아버지임을 결정적으로 계시하셨다. 『아버지, 이제는 나의 영광을 드러내 주십시오』(요한17, 5). 십자가를 통하여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낸데 대한 보답으로 아버지는 부활을 통해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신다. 목숨을 다 바쳐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준 (요한10, 17참조) 아들을 부활시키심으로써 아버지는 아들의 순종하는 사랑에 응답하셨다. 이 응답으로써 예수의 하느님은 아들 그리스도의 아버지임을 궁극적으로 계시하셨다.
하느님은 부활안에서 정의를 최종적으로 나타내 보이셨다. 무리하면서도 억울하게 고통 받고 죽은 아들의 무죄를 입증하셨다. 고통 받는 의인에게 정의로 보답하셨다. 『큰 소리와 눈물로 간구하신』(히브5, 7) 예수의 절규를 들어주셨다. 부당한 박해를 겪는 의인의 호소에 응하심으로써 정의를 밝혀주셨고 예수의 삶 전체가 옳았음을 판명해 주셨다.
그리스도의 현양
부활이 하느님의 종말론적 행위를 나타내는 시간개념이라면 현양은 공간개념으로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럽게 됨을 표현하는, 부활의 또 다른 측면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부활은 아들의 자기낮춤에 대한 아버지의 응답 즉 들어 올림이다. 요한에게 있어서 높이 들어 올림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림 (요한3, 14) 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하느님에 의해 높이 올림 받음을 뜻한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은『영광의 때』(요한17, 1)인 것이다. 현양은 십자가와 부활이 동시적 사건임을 드러낸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는 심오한 변화가 일어났다. 「성덕의 영」을 획득하심으로써 영적 그리스도가 되셨다 (로마1, 4). 그리하여 그분은 자신뿐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생명이 되셨는데 이 생명은 아들이 사람들에게 주기 위하여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생명이다 (로마6, 9~10).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새 아담」이 되셨다 (1고린15, 45). 새롭게 된 인류의 우두머리, 새 창조의 원리 (2고린5, 17), 전 인류 역사의 근본쇄신의 예고와 시작이 되셨다 (1고린15, 20~22). 그리스도가 온 우주에 대해 획득한 주권이 부활과 재림사이의 현재 및 닥쳐올 미래에 뿐 아니라 과거 즉 창조 때부터 행사되어온 것임이 부활로써 밝혀졌다. 이 관점에서부터 선재 (先在) 하는 하느님이 아들, 창조 때에 적극적 역할을 맡았던 로고스-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생겨났다.
아담 안에서 하느님이 모든 인간을 지어내셨듯이 이제 새 아담 안에서 온 인류를 새로이 창조하신다. 부활은 새 창조이다.
부활은 현양이다:『하느님은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를 다시 살리시고 지도자와 구세주로 세워 당신 오른편에 높이 올리셨다』(사도5, 30~31:1데살11, 10). 현양은「하느님의 오른편」(시편110, 1:마르14, 62:사도2, 23:에페1, 20)에 오름이다. 현양이란 천상에로의 등극, 하느님으로서 위엄을 띠고 권좌에 올랐음을 뜻한다. 현양됨으로써 신적 권능과 영광을 나눈다. 현양되신 분은 중보자이시어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에게 대신 간구 하신다 (로마8, 34:히브7, 25). 하느님의 오른편으로 현양 되셨다는 것은 저승에 있는 어떤 공간으로 사라져 갔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곁에 계신 예수의 존재를 의미한다. 또한 현세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뜻하지 않고 우리 곁에 계신 그리스도의 새 존재방식을 의미 한다.
현양은 부활이 곧 승천임을 시사한다. 루가는 승천을 부활하신분의 지상적 발현의 결론처럼 묘사하며 세상 안에서 교회가 사명을 시작하는 것과 결부 시킨다 (마르16, 15~20참조). 부활후「40일간」(사도1, 3)은 은총의 때, 준비의시기 (이스라엘의 40년간 광야생활과 예수의 40일간광야생활) 빠스카 사건의 충만한 체험을 가리키면서 예수와의 감각적 접촉이 끝났음과 세상에 예수를 선포해야 할 사명이 시작되었음을 표현한다. 승천은 빠스카 사건의 한 측면이다. 『승천하셨는데 마침내 구름에 싸여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셨다』(사도1, 9). 하느님의 발현에 대한 구양성서의 묘사에서 보여 지는 바와 같이 구름은 하느님의 멀리계심과 동시에 가까이 계심을 의미하는 표상이다.
승천은 보다 가까이 우리 곁에 계시기 위하여 신적 권능을 회복한 부활하신 분의 새 현존방식을, 그리고 부활이 교회를 세상 안으로 파견시키는 사건임을 드러내 보이는, 빠스카 사건의 한 측면이다.
부활로써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육적이면서도 영적인 방식 (영광스럽게 된 몸) 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되셨다. 『주님은 성령이십니다』(2고린3, 17). 부활하신 분은「영적 몸」으로 살아계신다. 영을 주는 몸이 되셨다. 부활하여 영적 존재가 되었지만 영광스럽게 된 몸을 통하여 은총을 전달해 주며 세상과 관계를 맺고 있다. 「영적」이란 생명을 주는 분임을, 「몸」이란 지상의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뜻한다:『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1고린15, 45). 『영적 몸이란 영에 의해 그 질이 규정된 육체 곧 하느님의 영에 의해서 전적으로 규정되고 지배되는 육체이다. 영적 몸은 하느님의 차원에 있다는 말이다』(Wㆍ카스퍼)
하느님의 종말론적 행위, 그리스도의 현양인 부활은 하느님 자신의 사건만이 아니다. 결국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완성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죄와 죽음에 대한 최종승리, 인간을 위한 해방으로서의 부활을 고찰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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