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은 내게 마지막 본당이었다. 옛날에 전 신부, 나 신부님이 다니면 그 길을 따라 인근의 청계산ㆍ광교산ㆍ수리산 골짜기를 누비고다니던 그 시절이 지금도 바로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안양의 발전을 생각하면 그저 신기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10년을 하루같이 넘어 다니던 고갯길로 다 없어져버려 지금가면 어디가 어디인지 도무지 모르게 변해버렸다. 논바닥에 집이 들어서고 서울에서 가까운 탓으로 주민들이 대거 모여들기 시작했다. 안양은 군포ㆍ반월시 등이 들어서면서 더 한층 발전가도를 달리고 있다. 예전에 다니던「포일공소」는 딱 한집이 살고 있어 진짜「독(獨) 공소」였는데 지금은 그 산꼭대기까지 집이 가득 들어차 있다.
구호물자를 동원해서 지은 안양본당을 감격스럽게 낙성하고 1963년 정월 가톨릭대로 발령을 받았다.
가톨릭대시절은 크게 기억 남는 일을 남겨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의 삶을 되돌아보며 다시금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예수성심-용산신학교 시절을 살았기 때문에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시대를 산 셈이었다. 시대적으로 무척 달랐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지금의 신학생들과 비교해보면 무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이런 것은 당시 신학생들과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요즘 들어 생각해보면 당시에 내가 했던 지시나 말이 혹시나「시대착오적」인 말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문이 들곤 한다.
신부하면「재속 신부」와「수도 신부」의 구별이 있는데 나는 수도 신부를 양성하는 신학교분위기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현재 가톨릭대학교는 시대에 부응하는 재속 신부를 양성하는 곳이니 나와는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생각 때문에 그때 출신 신부들에게「미안하다」는 말과「부끄럽다」는 말을 동시에 전하고 싶다.
내가 있었을 때 출신 신부들이 현재 한국교회의 중추인물이 되어있다. 교회를 잘 이끌어가고 부흥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는 모습을 보면 흐뭇함을 감출수가 없다.
그때와 비교해보면 한국 천주교회도 세계적으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이같이 위치가 향상된 것은 자랑거리인 동시에 신부들에게는 큰「경고의 충격」을 주는 한 일면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적으로 한국 천주교회에 대해서 희망하고 있는 그 방향에 우리는 부응해야 한다.
동양의 전교를 우리가 맡고 있다고 생각할 때「신부 사회」의 책임은 실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신부들이 앞으로 더욱 분발해서 지극히 하나요,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를 증거해야만 한다. 또 하나 신학교는「마귀」들이 특별히 마음먹고 활동하기도 쉬운 곳이라는 시실이다. 내가 다녔던 용산신학교도 12~13세 입학생을 비롯, 여러 명이 입학하지만 마지막까지 남아 사제가 되는 사람은 적은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이 신학교까지가 나의공적인 생활이다. 1974년은 퇴를 하고 논현동 청담동을 거쳐 86년부터 현재의 개포동에 살고 있다.
이제 만감이 교차하는 긴 회고를 끝내며 다음번에는 기억나는 대로「황해도 감목대리구 폐쇄사」를 마지막으로 엮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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