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호수 같은 바다를 끼고 장엄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도오사끼(堂崎)성당입구를 들어서자 정원 저쪽 십자가위에 매달린 등신상(等身像)이 고개를 약간 수그린 채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순례단을 맞아주었다. 바다표면에 반사된 가을햇살에 비쳐 마치 찬란한 광채를 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얼핏 예수 그리스도상인 줄 알았으나 가까이 가서 보니「고오또(五島)의 성인 요한의 순교상」이라는 팻말과 함께 동양인의 얼굴이 들어왔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 요한 성인은 1597년 오오사까에서 체포되어 나가사끼(長崎)까지 8배km에 이르는 긴 여정을 마친 후 니시사끼(西坡)언덕에서 다른 25명과 함께 십자가위에서 순교한 이 섬 출신의 19세 청년이다. 마지막 하느님께 기도하는 순간을 조각한 것이다 -
이 요한 성인의 등신대 십자가상이 고오또(五島)열도의 천주 교회사를 상징적으로 대변해준다
五島열도-.
일본 큐우슈우 九州) 나가사끼(長崎)항에서 배를 타고 서쪽으로 2시간 30분가량 가면 흡사 일본열도를 축소한 형태로 배치된 일단의 군도를 보게 된다. 열도의 중심 섬은 후꾸에(福江) 섬이며 이외 中通島久賀島, 小値賀島, 宇久島등의 큰 섬과 80여개의 작은 섬들이 모여 五島열도를 이루고 있다. 열도의 면적은 우리나라 거제도의 그것과 비슷하다.
나가사끼의 26성인 순교지나 운젠(雲仙)의 지옥, 또는 오다 쥴리아 유적지 등의 일본가톨릭성지는 이미 한국교회에 잘 알려져 있지만 이들에 못지 않는 비중을 차지하는 五島의 가톨릭성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섬 전체가 마치 가톨릭小國」이라고 五島열도의 가톨릭현황을 이야기 한다면 약간 지나친 표현일까. 거제도만한 섬에 본당이 16개, 공소가 10여개 있다면 반드시 지나친 표현만은 아닐 것이다. 1억 2천만 인구 중 42만명만이 가톨릭신자인 일본의 교세현황을 고려할 때 섬 주민 5만명 가운데 1만 1천여명이 천주교신자이라면 이미「가톨릭 小國」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五島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영록 (永祿) 9년인 1566년. 당시 島主 우이샤 준떼이 (宇久純定) 가 와병 중 서양인 의사를 구하자 이에 포르투갈인 수사「루이스 아로메이다」와 일본인 수사「노렌죠」가 열도의 중심섬인 후꾸에로 왔다. 두선교사는 영주의 병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의 병도 치료하자 그때부터 영주의 신임을 얻었으며 설교 때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五島에 가톨릭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1567년 도주 純定의 아들 純堯 (순효) 가 영세를 하고부터이다. 이 무렵 아로메이다 수사는 奧浦에 있는 절을 성당으로 개조시키고 1백20명을 영세시켰다. 순효의 개종으로 신자수는 자꾸 증가하여 五島전역으로 가톨릭이 퍼져나갔다. 이 무렵은 五島의 요한이 후꾸에 섬에서 출생한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五島천주교회는 꽃봉오리도 피워보지 못한 채 된 서리를 맞으며 시들어갔다. 1579년 순효가 죽자 그 뒤를 이은 純玄(순현)은 이 섬에 천주교가 전래 된지 20여년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탄압의 칼을 빼어들었던 것이다. 이후 五島에서의 박해는 1587년 도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공포한「기리시땅」금교령을 법적근거로 더욱 심화돼 1873년 메이찌 (明治) 시대의 신교의 자유가 도래하기까지 약 3백여년간 줄기차게 계속됐다. 박해초기부터 서양선교사들은 추방되었으며 교회가 파괴되고 교우촌이 습격, 방화와 약탈이 자행됐다. 이 와중에서 많은 신자들이 잡혀 죽었고 그렇지 않은 신자들은 한국의 박해당시 신자들처럼 산골로 숨어들어 신앙을 지켰다.
五島천주교회는 바로 이 숨은 신자집단의 존재 때문에 일본천주교회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4백여년의 선교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천주교회는 이러한 숨은 신자의 존재 때문에 역사의 단절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사베리오 성인의 일본선교이래 1세기도 채 지나지 않아 도요또미 히데요시에 이은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금교령으로 수만명의 순교자를 낸 끝에 일본천주교회는 사실상 침묵의 교회로 변하고 말았다. 탄압을 피해 불교도를 가장, 관음상을 위조한 성모마리아상을 집에 숨겨놓고 점조직으로 신앙을 지킨 신자들도 처음에는 적지 않았으나 3백여년이 지나는 동안 이들 중 대부분은 일본 토속종교와 천주교를 혼합한 나머지 마침내 천주교를 상실해 버렸다. 물론 매우 드물게는 신앙을 지킨자들도 있었지만. 19C말 신앙의 자유가 온 후 나가사끼에 새 성당을 지었으나 몇 년간 신자가 나타나지 않다가 성모마리아상을 세우자 몇몇 신자가 나타나『우리조상대대로 저와 같은 상을 경배했다』고 말해 일본을 떠들석하게 한 일이 있었는데, 이 같은「숨은 천주교신자」들이 五島열도에는 상당수가 집단으로 발견돼 전세계 교회를 경탄케 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은 대다수 가톨릭신앙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끼나까 (小西行長) 휘하의 세스페데스 신부가 종군, 조선인 포로들에게 세례를 주었으나 이후 신자와 신앙의 단절로 말미암아 한국천주교회의 기원을 18세기말로 정한 사실을 상기시킨다면 五島천주교회가 일본 천주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쉽게 집착할 수 있을 것이다
五島열도에 천주교가 명맥을 유지해온 것은 지정학적인 이유 때문으로 풀이된다. 일본의 천주교박해는 지방영주가 천주교신자가 되고 그 영주민이 또한 신자로 되어 중앙막부에 도전하는 것을 염려, 박해가 시작된 점을 감안하면 외딴 섬에까지 철저한 박해를 가할 필요성은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섬을 체포한 신자들의 유배지로도 활용한 흔적이 보인다. 1797년 五島의 도주 서문 (成運) 은 농지 등을 개간키 위한 이민을 보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이때 큐우슈우 지방 도처에 아직 남아 있던 천주교신자 농민들이 3천여명이나 이 섬으로 이주, 한 때 박해 중에도 교세가 제법 융성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明治시대까지 기복은 있었으나 박해는 멈추어지지 않았다. 1637년 九州 시마바라 (島原) 에서 일어난 천주교도들의 대반란의 결과, 도꾸가와는「기리시땅」을 국적 제4호로 정하고 박해의 고삐를 더욱 당겼다. 이 난은 당시 시마바라의 영주 松倉이 영주민을 학정한데서 비롯돼 대부분 천주교신자들로서 신앙의 박해를 받고 있던 영주민 3만명이 봉기, 原城에 들어가 12만명의 정부군을 맞이하여 88일간 처절한 혈투를 벌인 끝에 전원 전사 또는 학살된 종교전쟁을 말한다. 이 난의 여파로 五島에서도 대박해가 일어나 많은 사람이 천주교인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 잡혀 죽었다.
마지막 대박 해는 신앙의 자유가 도래하기 직전인 明治원년 (1866년)에 일어났다. 곳곳에서 신자들이 투옥되는 가운데 久賀島의 감옥에서는 불과 6평 크기에 2백여명이 투옥돼 연옥을 방불케 했다. 잠도 서서 자고, 배설도 서서한 이들은 교대고 고문을 받은 끝에 8개월 만에 42명이 죽어갔다. 이를「明治의 五島붕괴」라 일컫는다. 지금 이 자리에는 십자가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옆에는 공소가 세워져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마침내 신앙의 자유는 이 섬에도 찾아왔다. 1873년 明治정부는 신교의 자유를 선포했다. 1880년 다시선교사들이 찾아와 도오사끼(堂崎) 소 성당을 건립하는 등 전교에 박차를 가한 끝에 오늘날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1908년 정식 완공된 도오사끼 성당에는 五島천주교회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수백 가지의 각종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천주교신자들뿐 아니라 일본전국에서 수학여행은 학생들로 분비고 있었다. 박물관으로 꾸며진 성당 안에는「마리아 관음상」을 비롯, 나가사끼현 지정문화재인 드로우신부 설교목판화ㆍ최초의 선교사 아르메이다 수사의 수기ㆍ로사리오ㆍ요한 성인 관계자료 성모마리아상ㆍ메달 등 2백여점의 사료가 전시되고 있다. 특히 성 요한의 뼈 조각을 모은 유골 유리 상자가 제대 앞에 모셔져있어 경건한 분위기를 더욱 자아냈다.
후꾸에섬의 서쪽 끝에는 일본 최초로 루르드동굴을 모방 설치한 井持浦성당이 있어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올해로 금경축을 맞이한다는 본당주임 하다나까 신부는 한국 신자들은 처음이라며 무척 반가이 맞아주었다. 하다나까 신부는 작년 태풍으로 교회가 대파되었다며 복구공사 현장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며『빠져나가서 큰일』이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어 순례단은 후꾸에市 중앙에 있는 이열도의 중심교회인 후꾸에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기리고 전구를 빌었다. 미사 후 순례단을 접견한 하마사끼(演崎渡) 주임신부는『올림픽 때 일본선수들을 잘 격려해주어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과거 일본이 한국을 무척 괴롭혔기에 한국인들을 볼 때마다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과거 일본인들의 죄과를 대신해서 속죄하려했다.
하마사끼 신부의 말을 듣는 순간『일본천주교 신자들이야말로 바로 속죄양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1945년 당시 일본천주교회의 총본산이었던 나가사끼에 원폭이 투하돼 수많은 신자들이 전쟁의 속죄양으로 죽어간 모습을 떠올린데 이어 고려 말 조선 초 서남해안 각지를 오르내리며 무수한 한국인을 학살한 왜구들의 근거지인 바로 이 섬이 그 이후 박해 시 일본교회의 보루로 변한데 하느님의 깊은 섭리를 느끼며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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