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세계의 모든 이들이 모든 분야에서「인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주장되고 있는 인권이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눈에 띄게 향상되고 있지 못합니다.
근대 산업화 사회의 문질주의, 강대국 세력팽창주의의무기 경쟁, 개발도상국 정치권력의 독재 등이 인간의「인간다운 삶」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인권과 인간존엄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교회가 가장 심오하고 적절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과연『인간이 왜 존엄한가?』인간이 존엄하다는 의미 안에는「가장 보잘 것 없고 미약한」한 인간도 똑같이 존엄하며, 오히려 그러한 이의 인권이 더욱 지켜져야 한다는 뜻이 내포됩니다.
그러나 물질화된 상대주의 사회에서라면 그처럼 보잘것없고 못난 한 인간이 존엄할 이유가 없습니다. 잘 나고 돈 많고 권력 있는 인간일수록 존엄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고,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믿기 때문에 인간 모두는 똑같이 존엄한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는『너희 곁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작은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이 곧 나에게 잘해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정신에 따라 교회는 세상 모든 것 위에「인권」을 두어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중한 인권을 지키고 향상시키는 일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 일은「말」만으로써는 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또 개인적이고 부분적인 해결만으로써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인간 공동체와 사회구조 전반에 연대된 조건 안에서 개인의 인권은 참된 보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교회의 사회참여」를 강조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참여」문제가 나오면 마치 모든 신자가 정치가가 되거나 혁명가가 되라는 뜻인 양 오해하여 그 획일주의와 과격성을 경계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유로운 개성대로, 어떤 이는 천상 생활에 대한 희망을 증거 하도록 부름을 받았고, 어떤 이는 현세의 인간들에게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두 성향은 서로 반대되거나 대립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서로를 보완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결국「일치안의 다양성」을 견지하며 우리 모두가 세상의「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곧 사회참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소금이 제 맛을 잃지 않으려면 관념적인 주장만으로는 안 됩니다.「맛」은 체험적인 실제입니다. 여기에 실천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사랑」도 입술로만 할 것이니 아니라 실천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어느 도시 어느 마을에 가 보아도 교회의 십자가 첨탑들이 많이 들어서 있습니다. 밤에도 심지를 지나면서 보면 네온사인으로 된 십자가 첨탑들이 마치 텔레비전 안테나들처럼 많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회는 마땅히 인권이 지켜지는 정의로운 사회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며 파헤쳐지고 있는 이른바「5공비리」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광주항쟁의 참극 말고도 삼청교육대에 6만 7천여명이 잡혀가 그중에서 50여명이 시달리다 못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인권 판괴의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그 밖의 권력형 부정축재 정경유착 장기 집권계획 등이 낳은 온갖 부조리가 왜 지금에서야 파헤쳐지고 있습니까.
우리사회가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체제권력의 극대화가 일시 민중을 철저히 억누른 탓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이전부터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이사회에서 빛과 소금 누룩의 역할을 다했더라면 민족적인 이 불행을 미리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할 일입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사목헌장」(76항)은『인간이 기본권과 영혼의 구원이 요구할 경우에는 정치질서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따라 교회는 교황청에서 부터「정의평화 위원회」를 설치하였습니다. 한국교회도 1975년 정의평화위원회를 전국과 각교구에 두어 우리사회 안에서 정의를 구현하고 인권을 수고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려왔습니다. 그러한 우리교회의 노력에 대하여 국민대중이 신뢰와 기대를 보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위정자들과 그 야합세력들은 작금의 국회청문회나 특별위원회조사에서 밝혀지고 있듯이 수많은 비리와 불의를 자행하여 우리사회의 정의와 평화를 유린해 왔습니다.
우리사회가 앞으로 정의롭고 평화스러운 나라로 발전하려면 그러한 지난날의 비리와 불의들이 말끔히 청산되어야 합니다. 새사람이 되려면 마땅히 지난날의 죄과를 뉘우치고 회개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소위 말하는 지난날의 5공비리와 광주항쟁의 비극등부도덕하게 저질러진 모든 과오들을 슬기롭게 청산하고 새 출발을 하는 일입니다. 이중대한 일을 수행함에 있어 우리 국민 모두가 깊이 명심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일이 우리 모두의 성숙되고 냉철한 이성으로 국가사회 발전을 염원하는 충정과, 사랑, 화해, 용서 등 가정 인도적이며 그리스도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고 이 일이 그냥 덮어져 해결 없이 마치 광주항쟁사태가 올바른 해결 없이 8년이나 끌어왔듯이 넘어가 버린다거나 문제해결을 감정과 미움에 사로잡히거나 보복과 이해타산의 정신으로 감행한다면 우리 사회는 앞으로 더 큰 악순환의 늪을 헤어나기 어렵게 될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비리를 자행한 자들이 당하는 종국적인 불행에 대해서 연민과 아울러 책임을 느낍니다. 우리는「오류」와 「오류를 범한 인간」을 구별해야 합니다.
오류를 범한 인간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존중되어야 하고 구원의 가능성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동안 인권유린에 저항해 예사로 돌멩이와 화염병을 손에 들고 다니는 오늘의 젊은 세대에 대해서도 책임을 느낍니다. 질주하는 저항심의 결과로 젊은이들이「폭력의 변증법」을 정당시하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폭력과 증오는 우리가 취할 정당한 복음적 방법이 아니며 악순환을 초래하여 문제의진정한 해결책이 못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전대미문의 큰 변혁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앞으로 이 사회 안에서 우리의 인권이 어떻게 존중되고 발전해 나아갈 것인가 하는 중대한 갈림길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중대한 시점에서 그리스도인 모두는 다시 한 번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을 되새기고, 사회 안에서 정의와 사랑의 증거의 생활의 사명감 불러일으키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세상만사를 섭리하시고 안배하시며, 특히 사회 안에서 정의가 실현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나라를 위한 열렬한 기도를 바쳐야 하겠습니다.
오늘 인권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이북 동포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요즈음 희미하게나마 들려오는 이북 교회재건의 한 가닥 희소식에 접하며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그러면서 아울러 북녘 땅의 형제들이 하루 빨리 인간존엄과 평화의 날을 누리게 되고 기본적 인권의 하나인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를 바쳐야 하겠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988년12월4일
제7회 인권주일에
한국천주교 정의 평화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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