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거룩한 밤의 신비로움은 영원하신 하느님이 한 어린 아기의 모습 안에 자기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을 보여준 사실에 있다. 하느님은「종의 모습을 취하여」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다. 성탄은 인류역사의 중심을 이루었고 지구의 축이 된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육화(肉化)함으로써 인류와 세상은 그 최고봉에 이르렀다. 세계역사상 그 어떤 사건도 이 인간생활을 그렇게 깊이 사로잡지는 못했다.
예수의 탄생은 영원히 계속하는「오늘」의 사건이다. 즉 하느님의 아들이 베틀레헴의 마굿간에서 태어난 것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우리들 마음을 이토록 움직여 놓은 것은 평소에 갈망하던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드디어 나타난 때문이며 우리는 믿음 안에서 이 육화 사건의 영원한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태어난 것은 항상 계속될 것이며 늘 우리생활과 마음을 지탱해줄 것이다. 우리는 이 아기가 하느님의 사랑을 선언하고 있다는 것을, 또 바로 하느님 자신임을 확신하고 있다. 이 같은 사랑을 우리에게 선물하시는 하느님 앞에 우리는 오로지 몸을 떨면서 침묵을 지키고 있어야함이 옳을 것이다.
이 아기는 우리에게 생명을 갖고 오셨다. 즉 죽음이후에도 계속되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한다. 성경에서 말씀한대로 그는「충만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려고하며 그 이상 아무것도 더 원치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갖고 오셨다.『이 지극히 거룩한 밤에 참 빛을 우리에게 밝혀주신다』는 기도를 우리는 성탄날 자정미사 때 듣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잠시 오늘의 우리 세상으로 눈을 돌려보자. 과연 우리는 우리들의 생활 속에 하느님의 사랑이 빛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생활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넘쳐흐른다는 것도 단순히 하나의 꿈에 불과 한 것이 아닌가? 그냥 겉으로만 사랑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닌가? 만일 우리들이 평화스럽게 살지 못하고 서로가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산다면 이 성탄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직도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면 그리고 미움과 폭력과 불의가 우리주위에 난무하고 병고와 고통과 죽음만이 우리들 인생의 여정을 거의 결정하다시피 과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세상의 얼굴은 아직껏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있고 사람들의 마음도 근본적으로는 전화 다름이 없는것 같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왔으나 아무 곳에도 이세상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느님은 사람이 되고 우리들처럼 한 인간이 되었다. 즉 가난하고 배고프고 울며 추위에 떨고 그리고 죽어가는 우리중의 한 사람처럼 그런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이 옛날과 다름없이 남아있다면 이 성탄절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지금 이 세상 한가운데 변하고 있는 무엇이 있다.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조용히 그리고 은밀한 가운데 한 빛이 밝혀지고 있다. 구유의 아기로부터「변화」의 한 힘이 솟아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 아기는 우리 때문에 이 세상에 오신 분이며 이 땅위에 가장 불쌍한 사람을 위해 오셨다. 그는 이 가장 불쌍한 사람보다 결코 더 편하게 살려고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하느님이시다.
성탄구유의 그리스도 사건은 결정적이고 새로운 것을 주었다. 오늘 탄생한 구유의 아기 때문에 이제 모든 것이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었다. 세상은 물론 전과같이 세상으로 남아있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와 만물의 심장은 달라진 것이다. 이 변화는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이 세상을 몸소 경험한 때문이다.
또한 그분은 인간적인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받아들였으며 우리들과 함께 같은 형제로써 이 세상에 살다가 성부께로 가신 분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때부터 이 세상과 인류는 종래와는 다른 가치를 부여받았다.
구유의 아기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아들이 되고 형제자매가 될 수 있는 은총의 힘을 선물로 주셨다(요한1,12).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된 후 우리는「구원의 문」이 열리는 있음을 보게 된다. 이것은 누구든지 진실로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고 사랑하며 구원되기를 바란다면 이루어질 것이다. 하느님은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실 때 이를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강제로 구원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이 아기는 우리들의 선택하고 결정하도록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아기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어두움은 빛이 떠오르는 것을 막으려한다. 빛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분의 제자가 된 사람들까지도 그분을 마음속에 받아들이지 않고 그에게 자리를 내어 주지 않고 있다. 이제부터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느냐 않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오늘 이 성탄절도 각 사람이 선탠의 결정을 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우리가 만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그리고 하느님의 이 아기에게 한자리를 만들어 준다면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 될 것이다(그를 맞아드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은총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어둠속에 살면서 그에게 자리를 전혀 내주지 않으며 그는 구원에서 제외될 것이다.
누구든지 우리교회의 이 같은 신앙 안에서 거룩한 밤의 신비를 고백한다면 그에게는 빛이 비추어질 것이고 그는 평화와 기쁨을 얻게 될 것이며 이 구유의 아기처럼 복된 사람이 될 것이다.
<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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