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우리교회의 문헌들과 1801년(신유)박해대 순교하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의 일곱재 동생인 김현우(순우? ㆍ마태오)가 포청에서 진술한 내용을 중심으로 그 가정의 신앙과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에 대해서 말할까한다.
그의 가정의 신앙은 먼저 당시 역관(譯官)이었던 맏형 김범우가 1784년 이벽의 권면으로 천주교의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고 그후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1801년 (신유)박해때 순교한 동생 이우(履禹)와 현우(顯禹 혹은 순오? 마태오)를 입교시켰다. 그리고 또한 주위의 역관 친구들도 권면해서 입교시켰다.
그뿐아니라 그의 명례방(明禮坊:지금의 明洞) 집을 교회의 집회소로 사용케 하였다. 그러다가 1785년(乙巳年) 봄 그의 집 대청마루에서 이벽을 지도자로, 이승훈과 정약전ㆍ정약종ㆍ정약용 3형제와 권일신의 부자(父子)와 김범우 등 다수의 신자들이 모여서 신앙집회를 개최하던중에 형조금리(刑曹禁吏)에게 적발되어 이벽 이승훈 권일의 부자(父子), 정약전의 3형제 등 양반출신들은 풀려나고 유독 중인(中人) 출신인 집주인 김범우만은 감옥에 갇힌후 단양(丹陽)혹은 단장(丹場)으로 귀양을 간 얼마후 감옥에서 받은 상처로 고생을 하다가 끝내 장하치명(杖下致命)을 하였다.
그런데 그때 김범우는 옥중에서나 귀양지에서도 항상 큰 소리로 기도를 바치며 구원의 진리를 증언하다가 순교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 을사추조적발사건에 대한 이만채「벽위편」의 기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을사년(1785년) 봄에 이승훈이 정약전 정약용 등과 더불어 설법(교리강의)하였는데, 장례원 앞에 있는 중인 계급의 김범우 집이었고 거기에는 이벽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이는 지퇴당 이정향의 후손이요, 병사이사 이석의 형이다) 푸른 수건으로 머리를 덮어 쓰고 어깨에 까지 내리웠으며, 바람벽을 의지하여 앉았으며,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와 권일신(감사흠(歆)의 수혼으로 권철신의 동생이다) 부자(父子)가 모두 제자라고 칭하며 책을 끼고 둘러 모시고 앉았고, 이벽이 설법하고 가르치며 꾸짖곤 하는데 우리 유교에서 사제지간에 갖추는 예위에 비하여 훨씬 더 엄하였다.
그런데 추조금리(秋曹禁吏=오늘날의 형사들에 해당함)가 그 모임을, 술마시며 도박하는 것이나 아닌지 의심하고 들어가 본즉 거의 모두가 얼굴에는 분을 바르고 푸른 수건을 쓰고 손가락으로 해괴하고 이상한 놀림을 함으로, 그예수 그림과 책과 물건을 압수하여 추조(秋曹)에 가져오니, 추조판서 김화진은 그 양반집 제자들이 잘못된 길에 빠지게 된 것을 애석히여기고 잘타일러서 내보내고, 다만 김범우를 옥에 가두니, 권일신과 그 아들 및 이윤하(지봉의 후손으로 권일신의 매부다) 이총억(이기양의 아들) 정섭(이기양의 외종)등 다섯명이 곧바로 조정에 들어가 성화상을 되돌려 달라고 청하였으며 (이 성화상은 서양인으로서, 이른바 예수라는 분인데, 성현이 되었기에 그 상을 모시는 바라고 일렀으나) 누누이 호소함에도 추조판서는 누구누구가 이러는지를 심문하여 보고는 크게 놀라서 책망과 타이름을 한 다음 다시 내어보냈는데, 오직 김범우만은 귀양을 보내었다. 이에 태학(太學) 동제생 이용서 등 이 통문을 만들어서 사학을 엄히 배척하는 글을 돌렸는데, 누구누구가 하는지 그 성명은 탄로시키지 아니하였다」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그분의 순교 사실에 대하여 다음의 몇 가지를 더욱 주의깊게 살펴보고 또한 그 가정의 꿋꿋한 순교적인 신앙절개를 더욱 곺게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첫재로 그분이 순교한 연대와 날짜에 대해서 이만채의 「벽위편」에는 우리 교회의 첫번째 박해인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1785년 (乙巳年) 봄에 일어나서 김범우가 귀양갔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때 그의 동생 현우(顯禹 혹은 順禹마태오)가 포청에 잡혀가서 진술한 바에 의하면 「(金)範禹는 병오(1로 일어나고있는 병오(1876년)년에 사학사건으로 단양(丹陽)으로 정배되었다가 身死했다」고 했다. 그런데 또 한편 경주김씨(慶州金氏)그의 족보엔느 김범우(金範禹)가 귀양지에서 순교한 날짜가 丁末年(1787) 9월 14일 (음 7월 16일)로 젹혀있다. 그리하여 그가 귀양간 지명(地名)과 날짜와 순교한 날짜가 각각 다르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은 동생 형우가 포청에 진술한 것이 잘못 진술한 것이아니면 내용이 오기(誤記)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은 전반적으로 족보에 기재된 내용들이 너무나 자세하고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후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실제로 그의 후손들은 밀양에서 100년이상 살았으며 그뿐아니라 죄인들이 포청에 끌려가서 심문을 받으면서 작성된 결안(結案)들은 흔히 오기(誤記)되거나 변조될 가능성이 높기 대문이다. 다음에는 순교자 김범우 형제들과 그 후손들의 신앙생활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 특별히 그분을 비롯한 우리 순교자들의 겨례를 위한 순교의 참뜻으로 다시 새겨 보는 것이 어떨까한다. 왜냐하면 우리 순교자들의 순교사실이 모두 그러했듯이, 이분들의 순교는 비록 신앙을 증거하다가 순교하였지만 그당시 박해의 시대적 배경이나 사실들을 보면 유교적인 계급신분 시회에서 천주교의 「만민 평등」의 인권 사상과 정면충돌로 일어난 인권 신장운동의 발단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김범우 이분의 순교는 당시 을사추조 적발사건에 연유된 모든 사람들이 가정에서나 혹은 가문에서 심한 박해를 당하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관청에서는 양반들이므로 풀려났었다. 그런데 이분만은 유독신분이 낮은 중인(中人)이기 대문에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귀양가서 마침내 그 장독(杖毒)으로 순교를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가슴속에 회포를 느끼게 하는가? 이것은 오늘날 명동성당 즉 옛날 그분의 집이었던 명례방(明禮坊)을 중심으로 일어나고있는 인권운동 및 민주화운동과 밀접하게 관계시켜 볼일이다.
다음은 이분 가정의 형제들의 열렬했던 신앙생활과 그 후손들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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