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후 나의 신앙생활은 순탄하게 펼쳐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정계에 진출해 계신 사촌형님과 숙모님의 간청에 못이겨 제대의 길을 택한것이 병원입원이었고 실제로 몸이 아팠으니까 제대는 했지만 결코 쉽게 내 인생의 밝은 빛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칠순 가까이 홀로 계신 숙모님이 경영하는 과수원 농사를 도우면서 때를 기다리면 사촌 형님의 정치적 영향력에 힘입어 고향 땅에 정착하고 한가정을 꾸릴수 있으리라던 내 소박한 꿈은 처음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과수원이라는 곳이 나의 건강 특히 기관지 확장증 환자에게는 부적합한 자리였다. 왜냐하면 과수원에서는 병충해 방지를 위하여 사흘에 한번정도 농약을 살포해야 했다. 그런데 이 농약이 인체에 크게 유해한 것이었고 농약 살포가 끝나기만 하면 몸 속에 흡입된 지독한 독성 물질로 인하여 가슴을 쥐어뜯는 아픔으로 기침을 해야만했다.
게다가 숙모님과 나는 신앙문제에도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불교에 열심이다 못하여 사찰까지 짓고 그절에서 법명까지 받은 숙모님의 열성과 스스로 선택하긴 했지만 전교사와 같은 열심으로 1년여를 뛰다온 나의 천주교회에 대한 열성이 부딪칠 때마다 충돌을 가져왔고 심지어 천주교회에 대한 심한 반발로 주일에 교회 가는것까지 막는 일이 많아졌다.
천주교 신자로서의 진실과 수녀님께 배운 이웃 사랑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숙모님을 감동 변화시키고 종국에는 숙모님을 천주교회로 귀의 시키겠다는 내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는 생각이었던가를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읍내 교회의 주일미사시간은 11시였다. 숙모님은 나를 교회에 못가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늦게까지 그날 해야할 일들을 지시하고 읍내로 나가셨다.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산길 지름길로 달려 읍내 교회에 갔다. 간신히 미사시간에 닿을수 있었고 봉헌을 위하여 주머니를 뒤지니 동전 한닢없는 빈주머
니로 주님의 제단에 나온 것을 알았다. 봉헌시간이 되어 모든 신자들이 봉헌에 대열에 끼이는데 혼자만 자리를 지키면서 빈손으로 나온 내 부족한 정성을 용서 청하였다. 『그러나 주님 당신께 동전 몇닢을 드리지 못하더라도 내 어려움 내 고통 그리고 당신께 매달리는 내 신심을 드립니다. 내게 길을 열어 주십시오. 신앙생활마저 속박을 받아야 하고 눈치를 보아야하는 것이 제 현실입니다』『사촌형님의 정치적 권력을 믿고 그가 제게 베풀어 주기를 바라는 특혜를 기다리는 마치 감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이고 기생적인 삶을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간절한 기도였다.
퍼뜩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 아블함의 하란 탈춤이었다. 『네 친척 고향 아비집을 떠나 내가 지정해 줄 곳으로 가라』(창세기 12, 1~3)
자신의 안일과 평안만을 추구하는 곳에 새로운것, 훌륭하고 고상한 열매는 거둘수 없다는 것. 사촌 형님의 정치적 영향력으로 내 안일과 고향에서의 정착은 얼마나 비굴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내짐을 챙기니 간단한 여행가방 하나뿐이었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아브라함처럼 26세의 나이에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고향을 등지게 되었다.
<계속>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