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2년후 나는 가톨릭 교리신학원 현관에 서 있었다. 1개월전 교리신학원 신입생 모집시험에 웅시했고 입학식을 하러온 신입생 모집『주님 이제까지의 제 삶을 되돌아 볼 때 저는 부처님 손바닥안의 송오공처럼 제가 제 삶을 살았다기 보다 주님의 인도하심이었음을 깨닿습니다』『제가 지금 여기에 온 것도 당신의 인도 하심이오』『저는 제 앞길이 어떻게 될지 도무지 알지 못하오니 오직 당신의 지팡이와 사랑에 맡깁니다』글은 이렇게 썼지만 당신의 솔직한 마음은 『주님 뜻대로 하십시오』라는 심정이었다. 고향을 떠난 후 2년동안의 세상에 등을 대고 비벼볼 곳이 없던 나에게 주어진 일자리라고는 하루살이 인생들의 노동판 분이었다. 하루종일 뜨거운 태양열과 북풍의 매서운 추위를 견뎌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각반한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이곳이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일터이며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한 장소라고 생각하며 생명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러나 하루살이 인생에 지친 그들에게 복음의 말씀은 헛된 공이었고 귓가로 흘려버리는 소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닿게 되었다. 그랬기에 연약한 내 건강을 호소할 곳도 주님의 집이었고 내 고통과 실패를 하소연할 데도 주님 밖에 없었기에 열심히 교회에 나갔다. 자연스럽게 교회 청년조직과 가까워졌고 주일학교 어린이 교사도 말았으며 주일미사 해설도 하게되었다. 대구 병원에서의 1년여 가톨릭 서적과의 씨름에서 얻은 짧은 지식이 도움이 되었고 맡겨진 일들을 처리해 갈 수 있었다. 그러던중에 당시 본당의 전교회장께서 권유하셔서 교리신학원에 원서를 내게되었고 현관에서 기도를 바치게 된것이다. 그후 2년동안의 교리신학원 생활로 신앙의 새로운 경지에 눈을 뜨게 되었고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사명과 그택임의 분여자인 전교사의 필요성과 위치 그리고 전교사의 마음자세와 나자신의 자질과 능력을 발견하고 성장시키는 중요한 기간이었다. 늦게사 배우는 학과들, 성서학 기초신학, 인간학윤리신학, 전례학 등의 과목들이 생소한 것이었고 녹쓴 머리와 쇠퇴해가는 시억력을 되살리기 위하여 다른 수도자나 평신도 급우들보다 몇배의 노력을 쏟아야했다. 감의 시간에 밀려오는 졸음을 내쫓고 교수님들의 좋은 말씀을 놓칠세라 허벅지를 꼬집고 입술을 깨물며 당신의 도구로 쓰시고자 질그릇보다 못한 나를 선택해주셨으니 그선택에 응답하는 길은 오직 성실을 다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교리신학원 재학시저 은사셨던 이상운원장 신부님과 유재국 신부님은 하느님께서 준비해두신 또 하나의 내 인생의 나침반역할을 해 주신 분들이셨다. 대구의 수녀님께서 내인생과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해주신 분이라면 두 신부님은 거름을 주고 열매를 맺게 해주신 분들이셨다. 드디어 74년 12월 김수환 추기경님의 집전으로 전교사 파견미사가 봉헌되었고 전교사 자격증이 주어졌다. 『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한 알의 썩어버리는 밀알이 되십시오』라는 추기경님의 말씀을 들으며 한알 그대로 있는 밀알은 되지않으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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