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해를 1784년으로 보는 것은 지금까지 교회사 학계의 정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한국교회의 창설을 2백년이 아니라 4백년으로 소급시켜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이에 대해 우리는 두가지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그 주장을 뒷밭침할 충분한 사료나 해석이 제시되어 있느냐는 점이고 또 하나는 교회에 대한 올바른 개념위에서 해석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1, 평신도시기(1784~1795)
이 시기는 성직자의 도움없이 평신도만에 의해 교회가 창설되고 발전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한국교회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한 후 귀국해 종교집회와 신앙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시작됐다. 이승훈 등은 보다 큰 발전을 위해 영세와 성사를 집전할 구상으로 미사와 교해, 견진성사 등을 집전하였다. 그러나 이 성사집전이 「妄行」임을 깨닫자 이승훈 등은 1789년 북경에 밀사를 보내 선교사의 파견을 간청하였다.
2, 성직자시기(1795~1801)
주문모 신부의 입국으로 한국교회는 처음으로 성직자를 가진 일종의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성직자의 존재로 신자들의 신상은 전례와 성사를 중심으로 더욱 심화되었고 신부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통해 그때까지 피상적이었던 교리지식도 극복할수 있었다. 특히 주문모 신부는 교리지식의 보급을 통한 전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명도회를 세워 회원들로 하여금 전교활동에 헌신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회원만이 아니라 일반 신자들까지도 모두 전교를 일삼게되었고, 그 결과 신자수는 날로 불어나 신부의 입국당시 4천명에 불과했던 것이 6년만에 무려 만명으로 급증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박해로 신부의 활동은 제한 받을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교우들은 성사의 은혜에 참여치못했고, 성사에 참여한 교우들도 서울의 일부 신자들에게만 국한되었을뿐 시골에서는 신부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교우들이 허다하였다.
3, 성직자 영입운동(1801~1831)
1801년의 신유박해는 단번에 한국교회를 폐허로 만들었다. 무엇보다 유일한 신부를 잃음으로써 한국교회는 목자없는 고아신세가 되었다.
이에 한국교회는 성직자의 영입을 급선무로 여기고 북경주교와 교황에게 선교사의 조속한 파견을 호소하는 두통의 편지를 1811년말 밀사를 통해 북경교회에 전달하였다. 뿐만아니라 정하상과 같은 사람은 성직자의 영입을 성취시키고자 수시로 북경을 드나들었다.
한국교회는 1824년 또 다시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고 선교사의 파견과 함께 선교사의 체류보장을 아울러 요구하였다.
끈질기게 계속되는 한국신자들의 소호와 노력으로 로마의 포교성(인류복음화성)은 한국교회를 수도회나 선교단체에 맡기기로 결정하고 1827년 빠리외방전교회에서한을 보내 그 의사를 타진하였다.
그러나 뜻밖에 빠리 외방전교회는 한국교회를 맡는 것을 주저하였다.
4, 교구의 탄생과 주교의 부임(1831~1838)
포교성(인류복음화성)의 교섭이 빠리외방전교회측의 주저로 교착상태에 빠져있을때 뜻밖에 동회의 회원인 브뤼기에르 주교가 한국 포교지의 선교사를 자원하고 나섰다.
포교성(인류복음화성)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지원을 적극 받아들이고 이를 계기로 한국 포교지를 북경교구서 독립시키는 동시에 그를 교구장으로 임명키로 결정하였다. 이에따라 1831년 9월 9일 조선교구를 설정하는 교황칙서가 반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빠리외방전교회는 한국 포교지를 맡는것을 계속 꺼렸고 또 북경교구는 한국포교지를 포기하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은 3년이나 지연되었다. 마침내 모든것이 해결되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을 서둘렀으나 그는 1835년 10월 사랑하는 포교지를 목전에 두고 만주땅에서 병사하였다.
그러나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 그의 후계자들은 쉽게 입국할 수 있었으니 실제로 2명의 신부가 입국한데 이어 1837년 말에는 제2대 교구장 앵베르주 교의 입국까지 보게되었다.
맺음말
아무리 교회가 시작되었다하더라도 사제가 없고 더구나 주교가 없는 교회를 완전한 교회로 볼 수는 없다. 뿐만아니라 평신도에 의해 시작된 이들이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완성되기위해서는 성직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러므로 1784년 한국교회의 시작은 단계적으로 완성되어나갈 수 밖에 없었고 1837년 교구장인 주교의 부임에서야 비로소 완전한 교회조직을 갖추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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