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말한바와 같이 김범우(金範禹)의 집안은 경주김씨(慶州金氏)의 충선공파(忠宣公派)로서 은설공(殷說公)의 34세(世)자손(子孫)이다. 그런데 경주김씨(慶州金氏)의 시조인 김알지왕으로부터는 61세손(孫)이고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大安君ㆍ殷說)으로부터는 34세손(孫)인 것이다. 또한 그의 조상중에는 고려 고종 3년(1216년)에 거란병을 크게 무찌러서 나라에 공훈을 세운 김취려 장군이 있다. 그리하여 한편 이러한 연유로 고려때는 가문에 많은 인재가 등용되었으나 이씨조선(李氏朝鮮)에 들어와서는 이성계(李成桂)의 개국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스스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절의를 지키는 편이었다. 그래서 자연히 가문이 크게 번성하지 못하고 중인(中人)으로 있었는 듯하다.
부친 의서(義瑞)는 역원판관(譯院判官)벼슬을 했고 조부 경흥(慶興)은 만호증참판(萬戶贈參判)이었다. 또한 김범우(金範禹)자신도 역관의 집에 태어나서 그의 나이 22세때인 1773년 (영조49년)에 한학역과에 합격하여 종6품의 주부(主簿) 벼슬을 하였고 친족중 10여명이 역관생활을 하였다. 그러므로 가문에서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그는 자연히 일찍부터 통역관으로서 중국에 자주 드나들었다하며 또한 이로인해서 중국의 문물이나 당시 그곳에서 많이 성행하였던 실학과 천주교의 사상들을 접할수 있는 기회가 많았으리라고 짐작된다.
이렇게 해서 1748년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에서 세례를받고 돌아와서 한국의천주교가 창립될 때 이 벽의권면으로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뿐만아니라 앞서 말한바와 같이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여 형제들과 역관 친구들을 많이 천주교에 입교시켰으며 또한 거의 명례방(明禮坊:현재의 明洞)집을 천주교의 집회소로 사용케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마침내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때 포청에 붙들려 가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다가 단양(丹陽)혹은 단장(丹場ㆍ경남 밀양군 단장면 범귀리)으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장하치명(杖下致命)을 하였다.
한편 이렇게해서 그가 순교한 후에도 그의 형제들이나 자손들도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는듯 하다. 즉 이복 형제들인 이우(이禹)와 현우(顯禹혹은 順禹마태오)는 신앙생활을 계속하여 다른 집을 사서 거기서 『최필재ㆍ 이용겸 ㆍ손경윤ㆍ현개흠ㆍ 순준열ㆍ오가(吳哥)와 이우(이禹)등이 그집에모여 신부(神父)를 맞아 매월 7일에 예배보는 (첨례)기구를 설치하여 교주(주님)의 초상을 방내에 걸어놓고 장막을 치고 방석을 깐후에 신부(神父)가 주좌에 앉고 그의 형제와 모든 사람들이 열을 지여 앉아서 교회서적을 통학하였으며 집안의 여인들은 창밖에서 방첨을 하였는데 그것이 한두차례가 이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01년(신유)박해를 만나서 모두들 체포됐고, 형(兄)이우도 체포돼 포청에서 매를 맞고 순교해으며 또한 일곱째인 현우(顯禹혹은 順禹마태오)도 체포되어 1801년 5월 22일(음) 최인철, 강완숙 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밖에서 참수돼 순교하였다. 그런데 그가 포졸들에게 붙잡혀 끌려 갈때에 찬란한 십자가가 나타나 그의 앞길을 비추어 옥으로 가는길을 인도하였다는 말이 전해오고있다. 그러나 한편 그의 순교한 연대가 족보에는 순조 11년(1811년)으로 기록되어이어 좀 증명하기가 여렵다. 그렇지만 이것은 아마 족보에서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그 뿐만아니라 그의 12촌 형제인 김언우(金彦禹:세박ㆍ암브로시오)도 이때 천주교를 믿어 여림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27년 (정해) 박해때 겨앙도 안동 진영에 자수하여 1828년 10월 27일(음) 대구 감영에서 옥사했다. 그의 신앙생활은 순교할때까지 고신극그와 열심한 기도 그리고 스스로 가족들을 떠나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자수하여 순교할 만큼 열심하였다. 순교할때 거의 나이는 68세였다고 한다. 이와같이 김범우(金範禹ㆍ토마스)그분의 가정은 친형제 3명과 친척형제 1명 등 모두 4명이 열렬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순교하였다. 한편 이것은 그 당시 초창기 우리 한국교회의 신자가정들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열심한 신앙가정이었다.
그리고 또한 진심으로 열렬하고 숨막히게 신앙을 받아들여서 그당시 흔히 있었던 몇번씩 배교함도 없이 오직 주님을 위해 용감하게 진리를 증거하다가 순교하였다. 참으로 우리 후손들에게 좋은 신앙의 모범을 부여주었다.
그런데 한편 그의 형제들의 후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 수 없으나 김범우 이분의 자녀들은 아마 부친을 따라서 귀양지 밀얀단장(丹場?)으로 가서 거기서 1백여년동안 3대가 설면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는듯하다. 그리하여 이분들에 의해서 우리 경상도 지방에 처음으로 복음의 씨가 떨어져서 싹이나고 자라서 마침내 1801년(신유)박해때 벌써 밀양의 하동면에 신자촌이 형성되었는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 가야할 것은 아직도 순교자 김범우(金範禹토마스) 이분의 묘소가 이곳에서 발견되지 않은 이상 그가 귀양가서 순교한 곳이 이곳 밀양 단장(丹場)이라고 확정지을 수가 없다.
다만 앞에서 누차 말한바와 같이 후손들의 호구단자(戶口單子)와 편지 내용들을 보아서 적어도 1796년 (병진년) 이후에는 그의 후손들이 만어산(670m)을 중심으로 이곳 밀양의 단장(丹場)과 하동(下洞ㆍ현재의 삼랑진)에 살았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또한 더구나 이곳 단장(丹場)이 옛날 이조시대때 귀양지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결론지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었지만 이 순교자 김범우ㆍ토마스의 후손들이 이곳에 살면서 1백여년 동안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1877년 손자 겸동엽(장사랑 벼슬함)이 별세한 후 그의 장남 영희(潁熙)가 이곳을 떠나 경북 성주군 금수면으로 이사간 후에 온 가정이 냉담했는것 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이기경(李基慶)의 「벽위편(벽衛編)」에 1801년(신유)박해때 집의(執義) 尹羽烈이 상소한 (云云 「嶺南一道即我國根本之地 也稅近以來 便作邪學 之窒云…庚申五晦又請究西敎河東根窩…」(영남-또는 곧 우리나라 근본이 되는 지역인데, 근래에 문득 사학의 굴(천주교인의 부락)을 만들어… 경신년(1800년) 5월 그믐에 또 하동(河東)에 있는 천주교 소굴(부락)을 찾아 조처하기를 청하다…」 (이기경의 「벽위편」437페이지)에 있는 신자촌 하동(河東)은 경남 하동군(河東郡)이 아니라 위의 순교자 김범우의 후손들이 살았던 밀양군의 호동면(河東面)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또한 밀양군 단장면 (丹場面) 법귀리 (法貴里) 부근에는 옛날 박해시대 때의 신자촌인 정승골(밀양군 단장면 구천리)과 욱실(밀양군 하동면-삼랑진읍-우곡리) 신자촌이 있다. 그중에서도 「욱실」신자촌은 김범우 후손들이 살았던 바로 이웃 마을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하동의 신자촌」을 바로 이 「욱실」신자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또한 김범우의 증손자인 김영희가 1877년쯤에 이곳에서 경북 성주군 금수면으로 떠나올 때에 가문에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선조께서 서울에서 살다가 밀양 당잔으로(귀양와서 대를 이어 살았으며 증손자인 김영희때에 간신들(밀고자들)의 농간에 의해서 그 곳에서 살지못하고 어느날 밤에 집안의 종들이 모두 잠든 사이에 방안에 촛불을 환히 밝혀 놓고서 상주복을 입고 굴건제복을 하고 가만히 집의 수채구멍으로 바져나와서 정처없이 온다고 온곳이 바로 이 가야산 밑의 성주군 금수면 명천동까지 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떠나올때 모든 재산이나 토지를 그냥 두고 오직 족보와 목주와 성의패가 든 혼수함과 밥 그릇 몇벌만 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이것을 미루어 보아서 아직 박해가 끝나지 않았던 그때에 밀고 자들의 등살에 못이겨서 아마 성주 땅으로 피신을 온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제 족보의 기록상으로 순교 200주년 (즉 1987년 9월 14일)을 맞는 이해에 부산교구에서 이 분의 묘소를 찾고 또한 언양지방과 함께 이곳의 성지개발을 위해서 계획을 시작한것은 참으로 경사스런 일이다. 혹시 그분의 동상과 기념관이 하루 빨리 세워졌으면 하는 것이 그분의 후손들과 우리들의 간절한 소원이다.
우리 한국의 첫순교자인 명례당(明禮坊 현재의 明洞)의 집주인 김범우(金範禹 토마스) 그분의 순교200주년에 이나라 민주화의 민주화의 꽃이 피게 된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반드시 이분의 거룩한 순교정신이 명동이나 부산등 연고지에 도도히 흐르고 있을 것이다. (※참조:영조 계사년「역과 방목」에 김범우가 한학역과에 합격하여 종6품 주부벼슬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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