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손놀림이 서로 바쁘게 오간다. 한참이 지난후 그제야 이해됐다는듯 밝은 미소를 띄는 농아자 ㆍ연이어 웃으며 마주보는 얼굴은 18세 소녀처럼 청아하다. 조정호씨(34세 ㆍ유리안나).
조씨는 부산가톨릭 농아선교회 80여 농아자들을 위한 정상인 봉사자들의 수화(手話)교사이면서 농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또 미사는 물론이고 각종 행사때 농아자들을 위한 수화통역을 맡고있다.
그렇지만 농아자들의 눈에 비친 조씨는 교사나 통역자라기보다는 언니나 누나처럼 정다운 사람이기도 하다.
자신이 본격적으로 농아선교회에서 일한지는 3년 밖에 안됐다지만 선교회의 농아자들은 조씨를 통해 세상의 소리를 듣고 또 농아자 자신들의 의사를 조씨를 통해 이웃에 알린다. 말하자면, 조씨는 소리와 단절된 세계에 사는 농아자들의 창구요 대변인인 셈이다.
그녀는 농아자들을 위한 통역ㆍ교리외에도 농아자 개개인의 가정내에서 생활ㆍ직장내의 갈등ㆍ취직문제들을 해결해주느라 시집갈 생각도 잊었는지 모른다.
『12년전 레지오활동을 하다가 장애자들을 방문하고부터 그들을 위해 투신할 생각은 했어요. 그런데 농아자들만큼 나를 필요로하는 이가 없는 듯해요』농아자들과 삶을 섞게 된 계기를 밝히는 조정호씨.
이 처녀의 마음과 머리는 온통 농아자들의 문제로 가득차 있다.
우선 농아자들에게 있어 가정안의 문제는 클 수 밖에 없다. 대화없는 가정에서 살기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농아자 가족들이 수화를 전혀 못하다보니 걸핏하면 오해가 생기고 커져갈 수 밖에 없는 것은 불문가지.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한다」지만 농아자들은 실제 냉가슴만 앓을수 밖에.
이런 때 조씨는 곧잘 불려가 상호의 입장을 서로에게 전달해주면서 서로 이해케하도록 애쓴다. 조씨의 수화능력은 주위에서 모두 인정해주는 수준급.
『수화자체가 형용사나 조사의 표현이 극도로 어렵고 어휘는 부족하기 짝이 없어요. 그래서 수화를 잘 구사한다해도 오해가 생기곤해요』라는 조씨는 무엇보다 개개인의 성격과 환경을 파악하고 친숙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조씨는 이밖에도 농아자들의 직장문제 때문에도 힘껏 뛰어다닌다.
우선 농아자들에게 구두ㆍ목공ㆍ양복 세가지 분야외 취직은 하늘의 별따기.
이 분야 조차도 정상인이 일하기 어려운 작업환경ㆍ저임금의 직장에만 간신히 취직 할 수가 있다.
무엇보다 언어불통이라서 직장내에서도 오해가 많을 수 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문제가 생겨 쫓겨나기 십상이다.
농아자에게 새 직장을 구해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하는것도 조씨의 일이다.
『농아자 이기 띠문에 안된다』는 말을 들을때 가장 가슴 아프다는 조씨. 『그말을 농아자에게 어떻게 통역해줄수 있겠는가』고 반문한다.
「정상인만이 일할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을 체득하기 시작한 농아자들은 인생을 비관해버리고 완전히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곤 한다는 것.
이런저런 일때문에 조씨가 80을 바라보는 노부모와 함께 사는 아파트(부산 영주2동 시민아파트3동 A 405호 (44)0936)에는 농아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인간존중에서부터 시작하는게 사랑이라면, 소외될 대로 소외된 우리 농아자들도 존중해주는 사회』가 와야 한다고 그녀는 강조한다.
자신이 알려지기 싫다면서 한사코 기자를 외면하던 조씨가 취재에 응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때문이다.
또 노부모를 편히 모시고 싶은 갈망보다 더 큰 조씨의 소망이기도 하다. 넉넉치못한 가정의 이 막내딸이「농아」란 단어를 수십번쓰면서도 그 말 바로 앞에 「우리」란 단어를 한번도 빼먹지 않았음은 그녀 자신이 이미 농아자의 서러운 심정 속에 파고들어가 살고있었기 때문인가보다.
<昌>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