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와 주는 이 없이 쓸쓸하게 하루를 보내는 양로원 할아버지들이지만 오늘은 삼삼오오 옹기종기 모여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표정들이다. 수염은 안깎은 지 며칠이나 되는지 텁수룩하다. 백발의 머리도 더없이 헝클어져 보인다.
이들의 텁수룩한 수염과 헝클어진 머리를 단정히 깎아주고 말동무가 돼 주는 사랑의 이발사가 있다. 부산 서대신동에서 조일 이용원을 차리고 있는 김용이(요엘·40세) 씨.
양로원 할아버지들뿐 아니다. 김씨는 고아원, 결핵요양소, 나환자촌 등에서 세상을 등지고 자신의 삶을 한탄하며 소외된 채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손놀림을 쉬지 않고 있다.
김씨의 무료 이발봉사는 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73년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천주교인인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 김씨는 사랑도 귀중하지만 부모의 의사를 거의 무시한 당시 자신의 태도 때문에 적지않은 고민을 해오다, 연로한 할아버지들에게 자신이 가진 이발기술을 무료봉사함으로써 보속과 마음의 위안을 찾으려고 75년경 동래장전동에 있는 신망애 양로원을 처음으로 찾았다.
5, 6년간 1개월에 1번씩 들러 30~40명의 할아버지들의 머리를 매만져오던 김씨로 하여금 휴일조차 없이 가위놀림을 빨리하도록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천주교신앙.
집안대대로 불교를 믿어온 김씨는 아내의 권유로 82년 말 예비자 교리반에 등록한 후 이듬해 요엘이란 세례명으로 서대신 본당에서 영세했다.
신앙을 가진 후로 김씨의 무료이발 봉사는 더욱 더 가치를 갖게 됐다. 『신앙을 갖기 전에는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막연히 시작했지만 이제는 「주님의 뜻」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김씨에게는 1년 365일 휴일이 없다. 형식상 매주 화요일 이발소 문을 닫지만 사실 이날이 일주일 가운데 가장 바쁜 날이다. 장림에 있는 나환자촌과 삼랑진 나환자정착촌인 루까원, 송도 구호병원, 구덕노인정, 신망애 양로원 등을 순회하며 줄잡아 1백여명을 한 달에 4번 있는 화요일에 이발해 주어야 되기 때문.
나환자촌을 처음 찾을 땐 김씨에게도 용기가 필요했다. 나병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이 나환자들의 머리를 매만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씨는 나병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한편 하느님께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다.
이제는 가장 발걸음을 가벼이하고 들어가는 곳이 되어 버렸다고 활짝 웃는다.
지난번에 시간없어 머리를 깎지 못한 어느 할아버지가 『다음에는 꼭 깎아 달라』고 말한뒤 다시 갔을 때 그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가장 가슴 아팠다며 김씨는 말끝을 흐렸다.
한편 삶의 의욕을 잃고 절망하고 있는 한 결핵환자에게 머리를 깎아주며 삶의 용기를 북돋아준 결과, 그가 밝게 살 때 말할 수 없이 기뻤다고 털어놓는다.
김씨의 이같은 선행은 마침내 지역 사회로 소문이 퍼져나가 지난 8월 29일 부산시민회관에서 부산지구 청년회의소가 주관한 제9회 부산 청년 대상 사회봉사부문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사랑은 멀리 있는게 아니라 바로 우리주위에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받은 능력을 그대로 사회에 되돌려 줄 수 있어 무엇보다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