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생적(自生的)인 힘으로 한반도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지 1백5년여만인 1889년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골짜기 일대에 본당설립의 터전이 조성돼 한반도 땅에 성소자 배출의 또 다른 원동력이 마련되었고, 호남지역 복음 선교의 발판이 이뤄지게 되었다.
노령산맥의 주봉인 모악산 줄기상두산 국사봉에 둘러싸여 위치하고 있는 전주교구 내 화율리 수류본당(주임ㆍ이성우 신부)은 신학교 입학부터 서품 때까지 순수본당 출신 성직자 11명, 수도자 30여명을 배출, 「성소의 온상」으로서 그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다.
더군다나 전주교구 사제들 가운데 수류에서 태어나 유년ㆍ소년 시절을 보내 수류가 고향이라고 밝히는 성직자가 30% 이상에 달하고 있어 수류본당이 교구 내 성소의 밑거름, 원동력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와같이 수류본당이 호남지역 성소의 맥을 형성하고 그 못자리로서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 배경과 요인들, 특히 이 고장에 있어서 특유한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다방면에 걸친 자료수집과 함께 대부분 4대(代)에서 5대에 이르기까지 이 고장에서 신앙유산을 간직하고 살아온 본당 신자들과 수류본당에 적을 두고 사제가 되어 수류본당에서 사목을 했던 은퇴 사제를 찾아 그들의 증언을 들어본 결과 박해를 피해 형성된 교우촌이라면 어디에서나 발견될 수 있는 하나의 자명한 이치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초기 신앙선조들이 죽음을 무릅쓰면서 튼튼히 지켜온 신안유산과 더불어 맹종에 가까울 만큼 사제와 성소자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이 예외없이 수류본당에서도 많은 성소자가 배출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몇 대째를 내려오면서 신앙의 유산을 전승시켜온 구교우 집안에서 성소자가 많이 배출되었다는 점을 감안해볼 때 성소의 길에 대한 동기는 가정 공동체 속에서 유년ㆍ소년시절을 보내면서 보다 철저히 몸에 배어있는 신앙생활의 습성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영향으로 보여진다.
즉 단순히 신앙생활에 대한 이론적인 차원을 넘어 정해진 기도 시간에는 어김없이 십자가고상 혹은 성모상 앞에 촛불을 켜고 온 가족이 모여앉아 성서 귀절을 묵상하고 봉헌기도를 바치는 등 가정 공동체의 일상적인 신앙 생활 속에서 자녀들은 봉헌과 희생의 정신을 터득하게 되고, 이것은 후에 성소의 길을 택하는 밑거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구교우 집안에서 성장하여 신부가 된 사제들 가운데 자신의 유년ㆍ소년시절 때 도대체 신자집안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고맙다기보다 오히려 지긋지긋하게 생각되었을 때가 많았다고 고백하는 사제들이 더러있다. 꼭두새벽에 잠도 덜 깨어있는 상태에서, 저녁 늦게 입이 찢어질 정도로 하품이 터져 나와 졸리는 상황에서도 12단(註 참조)을 바치는 긴 기도시간에 자세를 바르게 가져야 했다. 또 아직 한글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어린 나이에 그저 부모가 말로 가르쳐주는 기도문을 외지 못하여 손바닥과 종아리에 불이 날 정도로 매를 맞아야 했던 기억들.
그러나 이러한 악몽(?)같은 일들을 회고하는 이들 모두는 한결같이 그러한 어거지적인 신앙생활이 후에 성소의 길을 택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또한 신학교 생활이나 사제생활을 하는 데에도 큰 격려가 되고 있다는 점에 이구동성으로 공감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초기 신앙선조들로부터 면밀히 전승되어 오고 있는 사제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과 성소자에 대한 공경심은 성소자 육성의 촉매적인 역할을 했다.
소위 가성직(假聖職)제도가 하느님의 법에 어긋남을 깨닫고 70~80리나 되는 험준한 산길을 관군의 감시를 피해 야밤에 걸어서 사제가 있는 곳을 찾아 고해성사와 미사전례의 은혜를 받아왔던 초기의 우리 신앙 선조들은 교회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성직자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찌기 체험해 왔다. 이러한 사실로 비추어볼 때 교우들은 사제직의 고귀성을 깊이 절감하고 자신의 자녀들이 이 고귀한 직분으로 불리움을 받는 것은 지상최대의 영광이라고 여겨온 사실은 자명한 이치다.
또한 자녀들 편에서도 어쩌다 한번 교우촌을 내왕하게 된 신부에 대한 어른들의 융숭한(?) 대접과 위용을 볼 때 사제직에 대한 동경심은 충분히 싹틀 수 있었을 것이다.
수류본당이 위치해 있는 상화(上禾) 마을 50여 세대 2백50여 주민은 대부분이 4대(代) 에서 5대를 이뤄오고 있는 완전 1백% 신자들인데 이곳 주민(신자) 모두가 한결같이 성소에 대한 고귀성을 신앙유산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도시화 현상으로 수류를 떠난 사람들도 많고 1~2명의 자녀를 낳는 핵가족적인 영향이 이곳에도 밀려오고 있지만, 수류의 신앙유산을 지켜오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하느님께 자신의 자녀를 봉헌하기를 갈망하면서 성소자에 대한 공경심은 여전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했다. (계속)
※註 12단(十二端): 성호경ㆍ삼종경(三鐘經)ㆍ천추경(天主經)ㆍ성모경(聖母經)ㆍ종도신경(宗徒信經)ㆍ고죄경(告罪經)ㆍ관유하심을 구하는 경ㆍ소회죄경(小悔罪經)ㆍ천주십계ㆍ성교사규(聖敎四經)ㆍ삼덕송(三德誦)ㆍ봉헌경 등 가톨릭의 중요한 12가지 기도문. 십이단은 조선교구 제2대교구장 앵베르 주교가 「천주성교공과」에서 발췌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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