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회사는 박해사라 말할 정도로 창설초기부터 박해를 겪으며 성장했다.
천주교는 창설된지 1년이 채못된 1785년에 박해를 받기 시작, 1899년 교민조약으로 한국인 신도들의 신앙의 자유가 법적으로 공인되기까지 오랫동안 탄압을 받았다. 그러면 조선정부가 프랑스와 굴욕적인 외교관계를 맺으면서도 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조선왕조의 국시(國是) 때문이었다. 조선왕조는 주자학적 유교를 신조로하는 정교일치 사회였으며 주자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학문사상을 이단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그것을 주장하거나 신봉하는 자를 사문난적으로 단죄할뿐 아니라 학문적인 문제까지 정치적으로 처리하여 박해를 일삼았다. 이같은 박해는 천주교의 신앙활동을 인정할 때 전통적인 가치관과 사회질서가 문란해지고 사회변동이 초래될 것으로 판단하여 취해진 대응책이었다. 따라서 조선사회가 느낀 충격과 위기의식은 단순히 종교적인 면만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인 위기의식이 포괄되어있는 것이다.
1) 종교적 요인
천주교 박해의 요인은 천주교의 종교적 진리에 있다. 주자학자들은 천주를 상제로 인식하고 천주가 천지를 주재하고 만물을 안양(安養) 한다는 점은 시인했다.
그러나 천주의 강생과 십자가의 수난은 존엄한 상제의 신성을 모독하고 초월성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 비판했다.
유교의 비판은 영혼불멸설과 천당지옥설에 집중됐었다. 천주교는 영혼의 존귀함이 천주와 비슷하여 사후에도 불사불멸하여 공과에 따라 천당으로 올라가거나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교에서는 혼이란 신체없이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고 신체가 없어지면 소산(消散)하여 무로 돌아간다고하며 영혼불멸설을 반박하였다.
제사는 효의 연장이며 제수를 차리는 것은 사사여사생(事死如事生)의 인정에서 자손의 정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는 조상에 대해서 자손이 할일은 천주께 기도드려 천당에 오르도록 간청하는 것뿐이므로 제수를 허례로 보았다.
이러한 갈등속에서 유교와 천주교가 신앙과 신앙끼리 정면 충돌한 것은 1791년 윤지충의 제사거부 사건이다. 그의 신앙결단은 사대부에 죄를 지을지언정 천주께 죄를 짓지않겠다는 것으로 현실세계에 더 높은 가치를 두는 천주교로의 전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후 천주교는 무부무군, 멸구난상, 흑세무민의 사도(邪道)요, 예속을 어지럽히는 사설(邪說)이요, 죽음을 영광으로 알기때문에 형정(刑政)을 이끌어갈 수 없는 흉도들이 금수의 종교라고 공격을 받았다.
2) 사회적 요인
유교사회의 기본구조는 가족질서에 있었다. 가족을 확대한 것이 국가이며 효의 연장의 충(忠)이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천주를 대군으로 내세워 이 세상에 누구도 절대적인 권위를 가질 수 없고 모나 부모나 군주의 권위도 천주의 절대권 앞에서는 상대적이었다. 이처럼 조선사회의 중심적인 도덕규범이며 제일가치 덕목인 충과 효를 천주께 바침으로 무부무군의 종교로 지탄받았다.
「천주교의 패륜성은 세속, 육신, 마귀의 삼구론(三仇論)」에서도 지적됐다. 자기 육신을 원수로 여긴다면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원수로 여기고 세속을 원수로 삼는다면 황이 통치하는 세속이므로 왕을 원수로 여기는 꼴이 되는 이치를 들어 비난했다.
유교사회는 남녀와 부부의 분별을 강조하며 그것이 없으면 금수의 상태에 빠진다고 했다. 그러나 천주교는 부부의 동등한 의무와 남녀 평등권을 가르쳤다. 그리고 정덕을 존중하여 동정생활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금혼(禁婚) 은 부부의 윤리를 끊고 인류를 멸절시키려는 행위로 지탄받았다.
3) 정치적 요인
조선왕조가 천주교를 탄압한 주요 요인으로 천주교를 정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파악한데 있다. 천주교는 박해가 시작되자 지하교회 생활을 하게 되었고 비밀결사화하여 갔다. 그래서 천주교도들은 황건적이나 백련교도들처럼 국가의 질서에 저항하는 반란도당으로 인식됐다. 특히 1791년 이후 이향(離鄕) 현상이 일어나고 심산궁곡에 교우촌이 형성되면서 그러한 인상은 더욱 짙어졌다.
조선왕조에 위협적으로 비쳐진 천주교도의 행동양식으로는 북학파와 같이 화이사상에 대한 도전을 들 수 있다. 화이의 고식적인 관념을 대담하게 타파하여 서양문화의 수용과 개방을 주창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천주교는 서구세력을 끌어들여 정부를 위협하고 서양의 무력을 동원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단체로 인식을 심어주었다. 18세기말의 대박청래 사건과 1801년 황사영백서사건이 그러한 예라 하겠다.
이외에 정치적 박해요인으로서 당쟁, 세도정치싸움, 쇄국주의 정책을 들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지배자들의 내부문제가 불씨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시대상황속에 부수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보다 박해의 요인은 신도들의 이념과 행동양식, 그리고 조선사회의 자기주체성과 정통성확립을 위한 정치적 노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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