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으로 하나는 조화(調和)와 중화(中和)를 의미합니다. 이렇게도 혼미ㆍ혼란ㆍ갈등의 세상에 사랑만이 그것을 조화하며 중화시키는 것입니다. 미움과 배신과 불의와 부정 불신 질투 시기로부터 구제받는 길은 오직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밖에 없고 하나가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가 된 것은 혼란하지 않음이며 갈등하지 않음이며 혼미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하나가 되는 길은 사랑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미움이 있다는 것은 하나가 아님을 말하며 배신이 있다 함은 하나가 아님이며 불신이 있음은 하나가 아닌 때문입니다.
이러한「하나의 사랑」은 동양적 사고에서 더 좋은 예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충군애국(忠君愛國)하는 사상에 있어서입니다.
본래 동양적 사고에 있어서 특히 유교적 전통에는 효제충신(孝제忠信)이라고 하거니와 충(忠)은 빼놓을 수 없는 도덕률입니다. 그런데 이 충은 가운데 중(中)자와 마음심(心)의 합성자인데 중심 즉 마음의 중핵은 바로 양심인 것입니다. 마음이 비뚤어졌다 함은 양심이 바르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마음(心)에 중심(中)이 하나 있는 것이 곧 충(忠)이요 마음 안에 중심이 두 개가 있으면 충이 아니고 환(患)이 된다는 것입니다. 임금님께 충성한다 함은 마음의 중심을 한 임금님께 의지함이니 결코 두 임금을 섬기는 충신이 없고 두 남편을 받드는 열녀가 없는 것은 이러한 데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충신관은 시대적으로 달라진 것이 사실이지만 근본 원리 즉 사랑은 오직 하나의 마음이란 점에 있어서는 아무런 변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오늘날에 있어서는 치자나 피치자 또는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인격의 소유자로서 평등한 인간적 수준에서 일치가 요망되는 것이며 그 일치는 오직 사랑으로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보겠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일치의 기본적 의미로서 하나의 의미를 보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치 위대한 하나는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는 바로 죽음과 자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보다 더 큰 일치가 있겠습니까? 자연보다 더 큰 하나가 있겠습니까? 누가 그 일치와 하나에로의 진리를 거역할 수 있단 말입니까?『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ㆍ21) 라고 요한은 말했습니다. 이때 하나가 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에 합일하고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두가 하나 같이 하느님의 뜻에 의함을 말합니다. 또『내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것은 다 내것』(요한 17ㆍ10)이라고 합니다. 네것과 내것이 사랑의 차원에서는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개울물이나 강물이나 바다 속에서는 바닷물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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