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엄위의 하느님
1. 『우리는 믿습니다. 이 한분이신 하느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 본성에 있어서뿐 아니라 그 전능하심과 전지하심 그 설리하심과 그뜻과 사랑과 같은 다른 완전성에 있어서도 온전히 하나이십니다.
하느님은 모세에서 계시하신대로『계신 그분』이시며 요한이 우리에게 가르치신대로「사랑」이십니다. 계심과 사랑, 이두가지 이름이야말로 가까이 할 수 없는 빛 속에 계시며 당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하느님의 형언할 수 없는 본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름과 모든 사물과 창조된 모든 지성을 초월하십니다. (바오로 6세의「하느님 백성의 신경1968년)』
2.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1968년 6월 30일 거룩한 사도들 베드로와 바오로의순교 1900주년에 즈음하여『하느님 백성의 신경』이라는 신앙 고백중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옛 신경들보다 더 넓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나는 하느님을 믿나이다』라는 신경의 시작부터 교회가 고백하는 하느님에 관한 진리를 간결하게 또 종합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하느님은 자신을 계시하신 분이며 우리 신앙의 하느님입니다. 호렙산 기슭 불타는 떨기속으로부터 모세에게 계시된『나는 있는자다』라는 그분의 이름은 오늘의 신경속에 여전히 다시 메아리 칩니다.
바오로 6세께서는 이이들-「계심=있음」이라는 이름-과「사랑」이라는 이름(성 요한의 첫째편지의 표현을 따라)을 결합시킵니다. 이 두 이름은 가장 본질적으로 하느님에 관한 진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본질에 대해 물으면서 하느님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려 할 때 우리는 역시 이 두이름에 의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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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오로 6세께서는 출애급기에 나오는『나는 내가 있는 자다』라는 하느님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여러 세기의 교의적 및 신학적 전통을 따르면서 그분께서는 그속에서『있음=계심』으로서의 하느님의 계시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분은「자립적 있음=존재」로서 성토마스 아뤼나스가 사용한 존재철학(존재론 또는 형이상학)의 언어로 하느님의 본질을 표현합니다. 『나는 내가 있다하는 자다』라는 말을 엄밀히 언어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른 뜻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부언해야 합니다. 그것은 나중에 언급할 것입니다. 바오로 6세의 말씀은 교회가 하느님은 누구냐?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데 있어서 오랜 세기에 걸친 신학적 및 교부학적 전통과 일치하여『존재』(esse)를 출발점으로 계속 취하고 있음을 충분히 분명하게 해줍니다. 다른 식으로 조리있고 이해가능한 대답을 정식화시킬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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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느님께서 자신을「존재라는 용어」로 표현함으로써 자기자신을 계시하시는 그 말씀은 계시의 언어와 옛날부터 소위「제1철학」이라고 했던 실재에 대한 인간지식의 언어가 특별히 만남을 암시해줍니다. 이 철학의 언어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식으로「존재」로서의 하느님의 이름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렇지만-성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을 되풀이하면서(CFㆍ꼰뜨라 젠떼스1, CCㆍ14, 30)우리시대의 가장 저명한 토미스트학파 대표자 중 한 사람이 지적하듯이-이 언어를 이용하면서조차도 우리는 기껏해야 하느님의 본질을 표현하고있는 이 계시된 이름을「입벌려 말할」수있을 뿐입니다. (CFㆍEㆍ질송, LETHOMISME, PARIS 1944년5판)인간언어는 사실 하느님에 대해서「누구냐?」를 적절하게 또 끝까지 표현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관한 우리의 개념들과 말들은그분이 무엇인지 보다는 오히려 그분이 무엇이 아닌지를 말하는데 도와줄 뿐입니다. (CFㆍ신학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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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는 내가 있다 하는 자다』이 말씀으로 모세에게 답하신 그 하느님께서는「하늘과 땅의 창조주」이기도합니다. 창조에 대한 계시된 진리에 관하여 뒤에 할 교리에서 말하게 될 것을 여기서 잠시동안 예상하면서 공통해석에 따르면「창조하다」라는 말은「비존재로부터 존재에로 부르는 것」즉「무=없음으로 부터」존재에로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지적해 두는것이 좋겠습니다.
창조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안에 자기존재의 원천, 자기존재의 근거를 소유하고 있지않고 그것을「타자로부터」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라틴말 구절「ens ab alio=타자로부터의 존재」에 종합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창조하시는 분-창조주-은 자기 자신안에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ens a se』)존재를 소유하고 계십니다. 있다는 것은 그분의 실체에 관계됩니다. 그분의 본질은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립존재(esse subsistens)입니다. 바로 이 이유때문에 그분은 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필연적」존재입니다. 「필연적 존재」이신 하느님과 달리 그분으로부터 존재를 받는 것들 즉 피조물들은 있지않을 수 있습니다. 존재가 그들의 본질을 이루지 않습니다. 그들은「우연적」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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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세계의 창조에 관한 계시된 진리를 이런 식으로 고려하는 것은 하느님을「존재」로서 이해하는데 우리를 도와줍니다. 이것들은 또한 이「존재」를 하느님의 이름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 모세가 받은『나는 내가 있다 하는 자다』라는 대답과 연결시키는데도 도와줍니다. 이런 반성에 비추어서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께서 들은 장엄한 말씀『너는 있지 않는 자이고 나는 있는 자이다』가 완전한 명확성을 얻게 됩니다. (성가타리나 Legenda majorl, 10) 이것이 하느님의 본질,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이것은 그분의 자아계시로 불러일으켜진 신앙으로 깊숙이 읽고 창조의 개념에 담긴 근본진리에 비추어 확인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언급할 때『나는 있다』와 『그분은 계신다』라고 대문자로 쓰고 더 낮은 경우는 피조물들을 위해 유보하는 것이 적당할 것입니다. 이것은「존재」의 벌주들을 따라 하느님에 대해 반성하는 올바른 방법의 표시도 될 것입니다. 그분은「IPSUMESSE SUBSISTENS=자립존재」인 만큼-존재의 절대적 충만, 따라서 모든 완전성의 절대적 충만이다-세상에 대해서 완전히 초월적이십니다. 그분의 본질로 말미암아, 그분의 신성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창조된 모든 것을「넘어가시고」무한히「능가하십니다」아무리 완전할지라도 하나하나의 피조물은 물론 피조물전체 즉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존재들을 무한히 능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의 하느님의「존재 하시는 그분」은 무한한 엄위의 하느님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엄위하심은 신적존재의 영광, 성서에서 여러 차례 찬미되는 하느님 이름의 영광입니다. 『하느님 내 주시여, 온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엄위로우신고!』(시편8, 2) 『과연 당신은 위대하시고 기적을 많이 하시오며 당신만이 홀로 하느님 이시니이다』 (시편85, 10)
『야훼 같으신 분은 없습니다』 (예레미야10, 6). 거창한 영광의 하느님 앞에 우리는 그저 겸손하고 기쁜 경배의 자세로 무릎을 끓고 전례적으로 TEDEUM(사은가)을 다시 노래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늘과 땅은 당신 엄위의 영광으로 가득찼나이다…거룩한 교회는 땅 끝까지 당신을 거창한 엄위의 아버지로 고백하나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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