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교포 의사인 나는 세가지의 각기 다른 군복을 입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을 지닌 사람으로(북괴군ㆍ한국해군중령ㆍ美해군중령) 6ㆍ25동란시 입었던 성모님의 은혜를 혼자 간직할 수 없어 필을 들었다.
당시 1950년 천신만고 끝에 괴뢰군에서 탈출해 낯선 남한땅을 떠나 산길을 헤매며 평양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동안에도 항상 묵주(로사리오)의 기도만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무리 피곤하고 바빴어도 산에서 잠들기전에 성모송을 한번만이라도 꼭 바치곤했다.
아무리 전쟁터라 하더라도 성모송을 바치고 지켜주시기를 성모님께 청한 후에는 세속이 알 수 없는 평안속에 잠겨 잠들 수가 있었다.
며칠동안 산을 헤매며 굶주림에 지쳐 쓰러져 잠들려고 할때, 6ㆍ25동란이 시작되기 직전의 일들이 주마 등처럼 스쳐갔다.
38선을 넘게해주는 안내자를 나의 어머니께서 6ㆍ25직전에 평양으로 보내주셨다.
어머니께서는 얇고 얇은 담배갑에 깨알같이 글을 쓰셔서 주셨는데『안심하고 이 안내자를 따라 월남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죽마고우였던 서우석(요한)신부님과 같이 1950년 6월 17일 평양역을 떠나황해도 사리원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38선 바로 북쪽에 있는 마지막 역인 청단까지의 기차표를 사면 도중에 의심받아 체포될 우려가 있어 황해도 사리원까지 기차로 가서 거기서부터는 걸어서 38선을 넘기로 했다. 이대 평양 관후리본당의 김세실리아 여회장님에게서 많은 물질적인 도움을 받았다.
사리원에 도착한 우리는 숙박부 기재ㆍ검문 등의 위험을 피해 사리원역 내에서 밤을 지새기로 했는데 밤중에 예정시간표에도 없는 열차들이 수없이 남하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이틀 열차에는 탱크나 대포 등의 무기가 가득 실려서 밤중을 이용해 남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본 안내자 얼굴에는 감출수 없는 긴장감과 초조함이 엿보였으며 심사숙고 한 후 우리들더러 월남을 강행할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한달더 기다려 달이 없는(그름달)날을 택할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했다.
우리들은 성모님께 열심히 기도하며 인도하여 주실 것을 부탁드리고 안내자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우리들의 의견을 들은 안내자는 한달 연기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우리들은 하는 수 없이 다음날 다시 평양으로 되돌아 왔다.
평양으로 돌아온 후 한달도 못돼, 아니 정확히 말해 8일 후인 6월 25일에 드디어 6ㆍ25남침이 감행됐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 만일 우리가 천주님과 성모님의 뜻을 어기고 월남을 강행했더라면 개미새끼 한마리 빠져나갈수 없이 38선에 집결한 괴뢰군 사이를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었겠는가?!
틀림없이 체포돼 간첩으로 몰려 총살되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이 모두가 다 성모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이 었음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X X X X
괴뢰군 탱크부대에서 극적으로 탈출해 평양의 이모네 집에서, 이종사촌동생인 조 바오로(선종)와 같이 불심검문에 걸리지않기 위해 지붕위와 다락속 등을 오락가락하며 숨어지내고 있었는데 하루는(인천상륙시??)6ㆍ25시작 후 평양에 대한 가장 심한 폭격이 있던 날로 기억된다.
하도 폭격이 심해지고 폭탄의 낙하지점도 점점 집에서 가까와져 동생 선종이와 같이 숨어있던 곳에서 튀어나와 무조건 목적지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폭탄을 피해서…
얼마나 달렸는지…도중에 많은 시체를 보았고 또 동생과도 헤어져 혼자 그냥 달리고 있는게 아닌가!
그날은 하늘에 높은 흰구름이 덮여 있어서 비행기에서 내려오는 폭탄이 흰구름을 배경으로 해서 자세히 볼수있었을 뿐만 아니라 폭탄의 수까지 셀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대의 폭격기(B29)가 전방 45도 각도쯤에서 불쑥 구름을 뚫고 나타나 10개정도의 폭탄을 투하하지 않는가!
이젠 틀림없이 죽었구나!
하고 뛰는것도 포기하고(튀어봤자 벼룩이지)그냥 그자리에서 엎드려, 다시 상등통회를 발하고 성모님께 매달렸다.
이번에는 폭탄이 높은데서 내려오는데 폭탄이 높은데서 내려오는데 폭탄의 속도가 음속보다 느리니『쏴-』하는 폭탄 내려오는 소리가 고막을 찢는다.
그 몇초 밖에 안되는 시간에 내 평생 이렇게 열심히 기도해본 적은 없었다! 『성모 마리아여…나 일찌기 당신에게 달아들어 버림받았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나이다. 어머니…나를 구해 주십시요. 꼭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이 되어 열심히 일하겠나이다』하고 매달렸다. 폭격이 끝나고도 얼마동안을 더 땅에 엎드려 성모님께 기도드렸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서보니 아무데도 다친데 없이 말짱했으나 옆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다 죽은 것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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