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류에서 태어나 이곳 출신으로 사제에 서품돼 1960년 수류본당 제 13대 주입 신부로 부임, 전교의 활성화를 위해 보다 교통이 편리한 원평에 성당과 사제관을 짓고 수류~원평간을 오가며 정열적인 사목활동을 펼쳤던 김반석 신부(은퇴ㆍ전주시 거성경기장 APT 거주)는 자신이 어렸을 때「본당신부의 지위는 마을의 왕이고 치안감ㆍ재판관이였다」면서, 「본당 신부의 판단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복종했었다」고 전해주었다.
또 김반석 신부는「당시 구교우 등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본당 신부의 식탁에는 항상 군침이 흐르는 맛있는 반찬을 정성껏 준비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회고하면서「어른들이 보여준 사제에 대한 그 지극한 존경심을 보고 자라나는 소년들은 자신도 신부가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수류본당이 성소의 못자리로서 그 발판을 튼튼히 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을 찾아보면 이 고장에 일찍부터 개화기 문화가 도입되었다는 사실을 간과 할 수가 없다.
곧 1990년 본당 제2대 주임 신부로 빠리의 방전교회 삐네(peynetㆍ裵嘉觴) 신부가 부임, 성전 건축을 시작하여 1907년 48간(間)의 웅대한 한국의 고전건축 양식을 갖춘 성당을 준공하고 이듬해 1908년 2년제(나중에 4년제 됨) 인명(仁明)학교를 설립, 이 고장에 개화기 문화를 영입시키면서 인재양성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한문 서당밖에 없던 당시에 이 학교는 전라북도에서 공사립을 막론하고 최초로 세워진 학교로 논어 등 한문과 중등과목 외 신학문을 교육, 산간벽지의 문맹들을 퇴치하는 선봉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성소자들의 초기 신학문 교육에 크게 이바지 했다.
학생들이 먼저 단발(斷髮)을 하지 않고서는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던 이 학교는 1942년 간이(簡易)학교로 바뀌고 해방 후 현재 화율국민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7세경에 이 학교에서 수학했었다는 김반석 신부와 수류본당 신자들은 한결같이「당시 인명학교는 신자담임 교사가 교육을 담당, 정규 교육 외에 신앙생활 전반에 대해 좀 더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경우가 많아 성소자와 신자 학생들에게는 성소의 동기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비 신자들에게는 가롤릭교리의 오묘한 섭리를 체득케하여 전교에도 큰 효과가 있었다는 사실을 많이 들어왔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이와같이 전주 교구내 성소의 맥으로써 그 위치를 다져온 수류 공동체의 형성은 1881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곧 1866년 병인박해로 말미암아 한반도 땅에 성직자가 한명도 없다가 1876년경 뮈텔 주교와 드게뜨 최신부가 입국, 1881년 오늘날 수류본당 서립의 근간이 되는 금구(金溝ㆍ現 김제) 배재(梨現)에서 일시 피신하면서 사목에 임하고 있었다. 그 후 1892년 장요셉 신부, 1893년 조모 이세 신부 등이 금구배재에서 선교하다가 1895년 라크루(Lacrouts 具瑪毖) 신부가 이곳에 부임, 외국인 성직자에 대한 탄압이 조금 완화된 상황을 틈타 보다 적당한 장소에 성당을 설립하고자 물색하던 중 배재에서 20리가량 떨어져 있는 수류에 전주 이진사라는 사람이 재실을 판다는 소문을 듣고 이 재실을 구입. 수류로 옮겨왔다.
그 후 1900년 배신부가 부임하여 성전건립에 착공, 1907년 성당을 완공하여 이 지역선교의 기틀을 닦았다. 이때의 수류본당 관할은 김제ㆍ부안ㆍ정읍ㆍ순창ㆍ고창ㆍ담양ㆍ장성까지였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배신부는 1908년 인명학교를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힘쓰는 한편 1918년에 행정당국의 인가를 받지는 않았지만 신앙 생활지도를 개설, 신앙교육에 주력하였다.
추측컨대 당시 이 여학교가 이 고장의 소녀들이 수도자의 길을 택하는데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 후 1950년 6.25사건의 발발로 당시 김현배 전주교구장ㆍ이약슬 부교구장ㆍ이기순 신부 ㆍ이대권 부제, 서울에서 피난온 임응승ㆍ유봉구 신부 등 사제 8명과 바오로회 수녀 14명이 이곳으로 피신함에 따라 수류본당은 기존 성직ㆍ수도자들을 보호한 성소 보호처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그러나 사변의 와중에서 이 지역에서 발생한 공산 게릴라들에 의해 50여명의 본당 신자들이 순교하고 1907년에 세워진 성당 건물이 불에 타서 소실되는 등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태로 말미암아 1960년까지 10여년 동안 수류본당은 김제 본당 관할에 속하게 되었으나, 1959년 김제본당에 김재덕 신부(주교ㆍ前 전주 교구장)가 재임시 수류신자들은 구호물자를 모으고 손수 모래와 자갈을 채취, 벽돌을 쌓는 등 교구의 보조없이 새 성당을 재건하여 오랜 전통의 신앙유산을 보존해오고 있다.
이와함께 오늘날 수류본당은 가정 공동체의 성화에 주력하고, 본당차원에서 성소 장학금 마련을 계획하는 등 한국 교회 내 성소자 배출의 맥으로서의 역할수행에 본당 공동체 모두가 합심하여 노력하고 있다.
한편 신학교 입학부터 서품때까지 수류에 적을 둔 순수 본당출신 성직자는 다음과 같다.
▲작고사제=김영우ㆍ서정수ㆍ박문규
▲은퇴사제=김반석ㆍ김영일ㆍ정재석(부산교구 거주)
▲현직사제=안복진(이리 영등동 주임)ㆍ박영규(미국 교포 사목)ㆍ한봉섭(고창 주임)ㆍ김병환(옥봉 주임)ㆍ윤양호(진안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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