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이남으로 밀려갔던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을 개시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삼팔선을 넘어 드디어 평양에 입성하게 됐다.
평양 입성전에 또 심한 폭격과 포격이 비오듯 떨어져 할 수 없이 길거리로 뛰어나가서 무조건 목적도 없이 달리다보니 나도 모르게 성당(대신리 천주교회)으로 달려가고있지 않은가!
이미 공산당에 의해 굳게 문이 닫혀진 성당이었으나 담을 넘고 들어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 빈제대였으나 파괴되지않고 아직 보존되어있는 제대 앞에 엎드려 기도드렸다.
며칠을 굶고 성당 안에서 홀로 지낸 후 총성도 뜸해진 어느날 성당마당에 나와있는데 성당마당 문이 열리며 낯선 군복을 입은 키 큰 사람이 카빈 총을 오른손에 치켜들고 들어서지 않는가!
틀림없이 인민군 복장도 아니고 일본군의 예군복도 아닌 처음보는 군복차림의 남자가 나를 향하여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먼지를 뒤집어써서 더러워진 얼굴이었으나 낯선 얼굴은 아니다. 군인도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 순간이었는지 누가 먼저였는지 알 수 없이 우린 두사람을 서로 달려가서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이 군인은 다른 사람 아닌 해방 직후 월남한 나의 큰형님(이병철ㆍ암브로시오ㆍ인천교구)이 아닌가?
당시 포병이었던 형님은 중화에서 평양으로 포격을 가하고 난 후 대대장에게 특별허가를 얻어 대대장 지프차로 아직도 산발적인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던 평양 시내로 동생인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 어찌 우연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성모님게서 내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다. 이 어찌 성모님의 도움과 배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모마리아께서는 오랫동안 헤어져있던 우리 형제를 내가 첫영성체하고 견진성사를 받고 매일 미사때 복사를 하던 성당에서 이렇게 극적으로 만나게 해주신 것이다.
그후 형님은 압록강을 향하여(초산)진군해야 한다며 나더러 서울로 내려가서 어머님을 찾으라고 하시며 주소와 약도 그리고 유엔군 군복을 주시고는 다시 북진하여 나아갔다. 나는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유엔군 군복으로 갈아입고 지나가는 군트럭(보급차) 위에 올라타 홀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 트럭은 하루종일 달려 밤늦게 38선 근처의 황해도 어느 작은 마을에 도착하여 내일 아침에야 간다고 하니 우리들(휴가장병들)은 하는수 없이 내려 추위속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한대의 지프차가 오더니 소위 계급장을 단 젊은 장교가 차에서 내려와서 우리들을 검문하기 시작하였다. 큰일났다!
나는 신분증도 없으며 머리도 최근에 괴뢰군에 붙들려가서 빡빡 깎았고 말도 이북 사투리 밖에 할 줄 모르니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수 있겠는가. 정말로 절망이었다. 그 심한 전투와 폭격 속에서도 살아났는데 이제 어머니가 계신 근처에 다와서 폭격기도 전투기도 탱크도 아닌 여섯자도 못되는 한사람에게 현장에서 즉결처분을 받게 되면 이 얼마나 한심한 개죽음이 되겠는가! 겁도 났지만 억울하고 원통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먼저 미군에 속해있던 카츄사들로부터 조사를 받느라고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나는 성모님께 달아들었다. 누가 보던말던 묵주를 꺼내어 계속 묵주신공을 바쳤다. 이제는 지칠대로 지쳤고 성모님께 무슨청을 할 용기도 기력도 염치도 없어 될대로 되라는 자포자기가 되어 다만 『주님과 성모마리아여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드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너는 뭐야! 증명서를 보자』라고 하는데 뭐라고 말이 나오질 않는다. 아니 입이 열리질 않는다. 절망적이었다..그런데 바로 그때 근처에서 같이 불을 쬐고있던 같은 소위계급장을 단 장교님이『아! 그사람은 나하고 같이 사는 사람입니다』라고 하시지 않는가 나는 내 귀를 의심하였다.
이 어찌된 영문인가? 나는 그 장교님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뿐만 아니라 그 장교님은 나를 빈집으로 데리고가서 잠까지 재워주셨다.
그분의 이름은 잊어버렸으나 당시 그분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반에서 6ㆍ25를 만나 소위로 임관되어 보조군의 관으로 근무중 휴가를 얻어 서울로 가고 있는 중이였으며 약혼자가 천주교 신자이고 약혼자의 동생이 서울 소신학교의 학생이라고 한다. 특히 자기 자신도 영세하려고 준비중이며 약혼자의 본당은 약현성당(중림동)이라고 한다. 이 어찌 우연한 상봉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찾아가는 곳이 다름아닌 약현성당이 아닌가. 그리고 나는 덕원신학교 학생의 입장이 아니였던가! 성모님께선 또 나를 버려두시지 않으시고 먼 훗날에 당신 도구로 쓰시려고 하신것 같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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