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7일은 추석 명절입니다. 이날 우리는 한해의 수확을 감사하면서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기쁨을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제사문제가 나올 때마다 천주교 신자들이 편안한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조상제사를 모셔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제사는 드릴 수 있지만 신주(지방)는 쓰지말고 축문도, 절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등 여러가지 제약을 가하는 수가 있읍니다.
거기에다 집집마다 제사 드리는 대상과 절차, 규모, 방법 등이 다르고 복잡하기 때문에 가족들간에 의견충돌이 있고 많은 혼란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집안이 함께 모여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즐거운 명절이 제사문제 때문에 서로 마음이 상해서 불쾌한 마음으로 지내는 수가 많읍니다.
한 집안에 천주교신자도 있고 미신자(유교전통에 따르는)도 있는 가정안에서 조상의 봉제사(奉祭祀)때문에 생기는 갈등에 대하여는 이미 필자가 1984년 2월호 경향잡지에 「신학자가 답한다」라는 글을 통하여 밝힌바 있읍니다. 제사문제에 얽힌 교회 당국의 허락과 금지가 반복된 끝에 현재로서는 허락되고 있는 그 배경과 역사적인 과정을 밝히며 『죽은 사람 앞에서 또는 죽은 사람의 초상이나 신주 앞에서 절하는 것, 그리고 다른 형태의 인간적인 공경의 표시를 하는것도 합당하고 가능한 일이다』라고 한 1939년 12월 8일자 교황 삐오12세의 칙서「제사문제에 대한 서약과 다른 몇가지 의례에 관한 교령」을 소개했읍니다.
그리고 결국 제사문제는 제사의 참된의미를 고려해 볼때 이교나 미신행사가 아니라 자신의 근본을 찾고 부모와 조상에게 효도를 다하는 하나의 생활관습이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과 연결시켜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균관대학에서 유학을 전공한 최기복 신부의 글「제사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재조명」(사목107호, 1986년 9월, 20~32쪽)은 유교의 제사와 가톨릭 교회의 제사를 깊이 분석하며 교회의 토착화 방향에서 전통문화를 보호육성하며 문화를 복음화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대책으로 현재 진행중인 한국 가톨릭 지도서에 여러가지 전례의식의 지침이 마련될것임을 언급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리와 신학적인 견해, 그리고 사목적인 배려를 구분할수 있어야 합니다.
조상 전래의 제사가 근본적으로 미신이 아니라 전통적인 표도의 한표현이라면 교리적으로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장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봉제사의 여러가지 형태를 효도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봐서 옹호하거나 혹은 미신적인 요소들로 간주하여 비관하는것은 신학적인 견해들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제사에 호의적인 예수회의 견해와 부정적인 다른 수도단체들의 견해가 대립을 이루어 결과적으로 금지와 허용이 반복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인 교리와는 다른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의 신앙생활을 위해 어떤 지시를 하는것은 사목적인 배려입니다. 1939년 12월 8일의 훈령에 준하여 한국 주교단이 제사문제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인 지침을 내린것은 당시 사목자들이 신자들의 영적선익을 위하여 내린 현명한 조치라고 할 것입니다.
사실 조선 8교구 모든 감옥의 교서(경향잡지, 1940년 7월호)에는 제사문제로 순교까지 당하던 천주교회에서 갑자기 제사 허용이라는 교령으로 인해 생길수 있는 불안과 불신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바른 이해를 촉구하고, 선교사(사목자)들에게 주어지는 사목지침서(Directorium commune missionum Corea)의 부록, 「미신적인 것들에 대하여」에서는 봉제사의 구체적인 내용에서 몇가지 제한(축문, 신주, 합문) 을 가합니다. 이것은 제사를 완전히 미신행사로 보고 박해와 치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던 기억이 생생하던 그 당시 상황으로서는 무조선 제사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당연한 조치였다고 볼수도 있읍니다.
따라서 사목적인 배려에서 나온 결정은 시기와 장소에 따라 사목자들의 판단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제사문제도 그렇게 따를 수 있읍니다. 오늘날도 사목자들이 제사를 미신적인 것으로 본다면 금지할 것입니다. 또 제사의 절차에 있어서 강신, 참신, 초헌, 독촉, 아헌, 종헌, 첨작, 계반삽시, 합문, 개문, 헌다, 철시복반,사신, 철상, 음복중에서 어떤것은 미신적이고 어떤것은 아니라고 판단하기도 쉽지 않읍니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에게 유교의 봉제사를 무조건 따르라고 지시할 수도 없읍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금지해서도 안됩니다. 절차의 일부를 미신이라고 해서도 안됩니다. 미신인지 아닌지는 유교에서 결정할 문제입니다. 만약 유교의 제사를 오늘날 천주교에서 무조건 미신이라 한다면 그것은 일부 악의를 가진 개신교 사람들이 천주교를 마리아신교, 우상숭배교다 하는 것과 마친가지로 자신의 무지로써 타종교를 비방하고 악선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짓임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읍니다. 제사는 근본적으로 효도의 한 표현이고 절차상의 조금 이상한 표현양식에 크게 구애받을 필요는 없읍니다.
따라서 신자와 비신자가 섞인 가정에서는 제사의 근본의 미를 생각하며 가장(제주)의 뜻에 따라 모든 것, 즉 제사의 구체적인 절차에 불안을 느끼지 말고 따라 하면 됩니다.
모든 가족이 신자거나 자신이 가장(제주)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쉽게 이끌어 갈 수 있는 처지라면 구태여 유교의 절차가 아니라 천주교회의 절차를 따르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즉 고상 밑에 상을 마련하여 사진과 꽃을 놓고 촛볼을 켜서 간단한 정성을 표시한 다음 가족들이 모여 연도를 바치고 함께 성당에 가서 미사를 봉헌하고 식사를 함께 한 다음, 묘지에 가서 도 연도로서 제사를 대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음식상을 유교격식대로 차려도 그만이고 안차려도 그만입니다. 즁요한 것은 우리의 정성어린 마음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불복과 싸움의 하느님이 아니라 우애와 평화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오로 사도의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에 대한 태도를 보며 구체적인 우리의 마음가짐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8장 1~13절에서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에 대해 언급합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닌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는다고 더 이로운 것도 없고 안먹는다고 해서 더 손해 될 것도 없읍니다. 다만 여러 분의 자유로운 행동이 믿음이약한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여기 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우상숭배와 미신행사가 만연하던 그 당시에 바오로 사도는 애덕의 관점에서 처신하도록 가르친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의 조상 제사문제에 적용시킨다면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가정 안에 주님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조상제사에 참여할 때에는 효도의 한 표현이라는 제사의 참뜻을 수시로 일깨우면서 부담없이 제사에 참여 하십시오, 어느 부분이 미신이다 아니다 하면서 논쟁을 하여 가족들간에 애덕을 거스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믿는 사람들이 라면 기도와 성사, 희생과 사랑의 제사를 바치십시오. 그것은 모든 불완전한 것들을 완성시켜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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