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관
우리민족의 근대 의식 발로는 보통 개항을 전후한 시기를 그 출발점으로 한다.
그러나 사상사적인 측면에서는 이를 더욱 소급, 이조 중기이후로부터 보는데 그것은 우리 근대민족사상 형성의 원동력이 되었다 할 수 있는 천주교의 수용때문이다. 선구자로서의 한국천주교회는 그 정착 과정인 구한말을 통해 너무나 큰 시련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이는 신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조선정부와 프랑스 공화국과의 조약체결상의 문제점과 함께 상호간 몰이해의 결과였다. 그러나 불완전하나마 한ㆍ불조약은 조선에 처음으로 신앙의 자유를 명문화한 것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의 정착이 가능해지고 제물포, 부산등 개항지에 잇달아 본당이 설립되는 등 방인 성직자 양성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반면 프랑스선교사와 민간인, 또는 지방 관리와 교우간의 충돌이 빈발함으로써 교안이 발생, 한ㆍ불양국간의 문제가 확대되었고 이로써 양국간의 제협정이 체결, 비로소 한국에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다.
Ⅱ, 한불조약과 조선왕조의 천주교 공인문제
한불조약은 열강인 프랑스와 약소국인 조선과의 사이에서 체결된 대표적인 불평등조약으로 신교의 자유를 보장받으려는 프랑스측의 노력이 반영된것이다.
1886년 6월 5일 조선측 대표 한성판윤 김만식과 미국인 외교고문관 ONㆍ데니, 프랑스측의 Cogordan에 의해 체결된 한불조약은 선교사들에게 치외법권, 영사재판, 개항지에서의 토지매입, 교회건축 등의 합법적인 수속을 인정하고 조선 국내 여행시 호조를 발급받도록 규정함으로써 프랑스 선교사들의 선교사업을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조약체결 이후에도 천주교에 대한 금지를 해제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프랑스 선교사들의 입국활동은 허가하면서도 선교활동은 할 수 없었다. 따라서 프랑스 선교사들은 호조를 휴대하면 전국 어디나 여행할 수 있어도 그곳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토지매입이나 교회건축은 할 수 없었다.
Ⅲ. 교안사(敎安事)와 외교문제
이원순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1886년부터 1906까지 각종 공문서나 교회문서에 나타난 교안사는 약 3백건에 이른다. 이들 교안은 대체로 ①프랑스선교사들의 여행 전교활동에 대한 지방인의 반발, 축출 폭행소동 ②정부의 박해정책 종식에 대한 몰이해와 반발서 취해지는 지방관리들의 부당한 조치 ②유림ㆍ지방민 또는 보수세력에 의한 반서교 행동 ④치외법권을 누리는 프랑스선교사의 그늘 아래서 사리를 취하는 비행 교인들의 행각 ⑤교ㆍ민간의 각종 분쟁과 송사에 있어 교인을 옹호하려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과잉 행위등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사소한 대립이큰 싸움이 큰 싸움으로 확대되자 교획측에서는 선교사들과 프랑스 공사관에게 호소, 한불간의 외교문제로 확대되었다. 더우기 치외법권을 누리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수난에 대해 프랑스 정부는 단호하게 조선정부에 항의하는 한편, 군함을 제물포앞바다에 정착시키고 군사적인 시위까지 벌였던 것이다.
Ⅳ. 신앙의 자유보장과 국권회복운동
한불조약체결 이후 끊임없이 발생해온 교안을 원만히 해결하기위해 한국천주교회와 조선정부 사이에서는 그 해 결책의 일환으로 교민조약(敎民條約)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구체적ㆍ현실적 성격상 정교분리원칙을 선언하는 일반적 표현으로 나타나지는 않으나 선교사는 행정에 간여치 못하고 행정관은 선교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현실적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정교분리에도 교안이 계속 발생하니 그 해결책으로 1901년 7월 2일 제주 찰리사와 신부사이에 교민화의 약정이 체결되었다.
결국 프랑스정부는 1904년 6월 주한 프랑스공사 colin de plancy 와 대한 정부 외부대신 사이에 선교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국정부에서도 한인에 대한 신교의 자유를 공인하게 되었다. 따라서 전국 어디서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본당의 설립등 지방 정착권도 법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는 이 시기에 한국천주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었으나 나라를 잃은 슬픔속에서 애국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선교사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한국교회는 국권 회복운동에 범 교회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으나 안중근의사 및 서상돈 선생과 같이 개별적으로는 이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Ⅴ. 결어
서양선교사들의 공과가 어떠하던간에 천주교회는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개화기의 혼란한 사회속에서 구빈사업ㆍ구원사업ㆍ교육ㆍ언론 등을 통해 개화운동을 추진했고 애국ㆍ구국운동을 전개했던 한국교회는 이것을 좀더 새로운 사실의 발굴을 통해 규명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많은 한국 지성인중에 한국천주교회의 구국ㆍ독립운동에서의 역할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띠고있는 사람들이 적지않기 때문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가톨릭 지성인들은 교안에 의해 비롯된 구한말의 불미스런 과거를 거울삼아 국가와 민족 모두와 공존되는 보다 발전적인 가톨릭의 새역사를 창조해야 할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