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신분증도없이 서울로 남하하던중 국군의 불심검문에 걸려 즉결처분으로 죽을 위험에 직면해 있던 나를 구하여준 이 장교님은 다음날 나를 서울 약현성당까지, 아니 물어 물어 우리집까지 직접 찾아주셨다. 이분의 이름과 주소를 알고싶다. 지금은 50대후반 아니면 60대초반이 되어 서울 또는 미국에서 개업하고 계시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정말로 한번 찾아 뵜으면 한이 없겠다. 당시 가명국민학교 교정(현 요셉병원자리) 옆에 있는 한 집의 문을 가리키며 이곳이 우리 가족이 살고있는 집이라고 하셨다.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떨리고 떨려서 도저히 문을 밀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얼마나 이날을 고대하고 고대하며 이북에서 살아왔던가! 이제 그 희망이 현실로 닥쳐오니 겁이 났다.
드디어 기다리다 못해 그 장교님께서 문을 미니 문은 잠겨있지 않아서 그대로 열렸다. 이미 땅거미가 져 어두웠고 전쟁중의 파괴로 전기도 없어 촛불 빛만이 부엌쪽에서 깜박거렸다. 이렇게 이틀만에 올수있는 서울을 어머님과 형제들이 있는 집에 오는데 5년이나 걸렸구나!
누구를 불러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느다. 얼마 동안을 그렇게 서 있었는지 모른다. 또 할 수 없었던지 그 장교님께서『계십니까?』라고 불렀다.
부엌에서 낯익은 여자 한 분이 나오며『누구세요?』라고 한다…. 틀림없는 작은누나(이영자ㆍ글로리아수녀ㆍ영원한 도움의 성모회총장)였다. 그러나 말이 나오질 않고 발도 땅에 들어 붙어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 또 『누구냐?』고 묻는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안방문이 열리며 어두운 빛에서나마 몽매에도 잊을 수 없었던 어머니께서 나오시지 않는가!
어머니께서는 주위가 어두워서인지 몰라보게 성장하고 게다가 군복차림을 한 나를 얼른 알아보지 못하고『누구를 찾으시냐?』고 다시 물으셨다. 드디어『어머니!』라고 부르며 어머니의 품안으로 파고들어갔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그냥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누님과 동생(이병춘) 작은형(이병선)도 나와서 모두 한덩어리가 되어 한없이 울었다.
다음날은 죽었다고 알려진 나를 위하여 연미사를 봉헌하기로된 날이었으나 내가 살아돌아왔으니 생미사로 바뀌었다.
이 어째 성모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랴! 나는 확실히믿어 의심치 않는다. 너무나 고맙고 고마워서 내 생명 다하도록 성모님의 은혜에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려고 노력하기를 굳게 굳게 다짐하였다.
그러나 재회의 기쁨도 중공군의 참전으로 곧 무너지고 말았다. 유난히도 추웠던 1950년 12월 우리 가족은 입대하여 중공군과 싸우고 계시던 큰 형님(이병철ㆍ암브로시오)과 매형(김광수ㆍ가톨로)을 제외하고는 단 한 사람의 이산가족도 없이 무사히 한강가교를 건너 영등포역에 이르러 화물차 지붕꼭대기에 올라탈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비록 3일간이나 걸렸으나 성모마리아의 도움으로 무사히 부산진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부산에 도착하여 우리 가족이 갈 곳이라고는 대청동에있는 성당뿐이었다. 당시 불교의 사찰을 구입하여 그대로 성당으로 쓰고 있던 대청동성당에서 남녀노소의 모든 피난민들이 같이 기거하게 되었다. 여기서 뜻밖에도 흥남과 원산항에서 미군함정으로 후송되어온 덕원 신학교의 옛친구들과 베네딕또회 수사님들과 최명화(베드로) 신부님, 김베다 신부님 등을 만나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었다.
다행히 우리들은 최명화 신부님과 김베다 신부님의 주선으로 초량에 있던 모 미군부대에 취직되어 휴일도 없이 하루 12시간의 중노동을 하게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그당시 다른 동료들의 부산 부두노동 등에 비하면 그야말로 놀고 월급받는 것처럼 느껴졌으며 마치 큰 벼슬을 얻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식당뽀이(K. P. )로 일하게 되었다. 이 미군부대 바로 옆에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괴뢰군의 포로 수용소가 있었다. 하루는 그들속에서 같은 괴뢰군 탱크에 타고있던 옛전우(?)를 발견하였다. 마구 가슴이 뛰고 무섭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또 가련하기도 하고……참으로 착잡한 기분이었다. 물론 충분한 대우를 받고 있었겠으나 하루는 동정하는 마음으로 미군들에게 나누어주고 남은 음식(모두 바다에 내다 버리곤했다)을 철조망 위로 던져 주었는데 때마침 순시중이던 미군헌병(M. P. )에게 들키고야 말았다.
큰일이다! 어떠한 오해를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무슨 비밀연락을 취했다고 생각하고 또 내가 과거에 괴뢰군 탱크병이었다는 것이 발각되면 나도 포로수용소에 넣어버리겠지…
나는 곧장 부대장실로 끌려갔으나 참모회의가 끝날때까지 두사람의 헌병사이에 서서 기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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