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하고 큰 초가를 벽을 쳐내고 개수하여 공소로 사용하였다. 멍석을 빌려다 깔고 흙벽에 벽고상을 걸어놓았다. 젯상을 구해다 제대로 만들고 옹기종기 모여앉아 첨례(공소예절)를 본다. 초성이 잘 안 맞고 서툴러도 신명이 난다. 반음을 낼 줄 모르는 성가 소리는 자작곡이지만 부끄럽지않다. 하느님 찬미에 명칭이라야 할 게 뭐냐? 마음 있어 정성 있어 모두 기쁨에랴.
기도의 내용이 무슨 뜻인지 몰라도 좋다. 윗대 할머니가 나무아미타불이 무슨 뜻인지 모르셨어도 하많은 날들을 그렇게 빌며 사시지 않으셨는가. 그 후에 들은 기도의 뜻 따위를 분석ㆍ이해하려 드는 별난(?) 사람들을 신통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그저 기도하는 기분 기도한다는 태도만으로도 만족한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짧은 것보다는 긴 것, 명확한 것보다는 구성진 것을 좋아한다.
이렇게 자기 기분에 맞으니 열성적이었고 열성적이니 자연히 예비자도 많이 생겼다. 신부님을 모시고 가서 미사를 드리면서 보니 남자 예비자만 50명이 넘는다. 보기도 듬직하고 기쁘다. 이렇게 잘만 계속되면 일 년 후에는 멋진 공소집을 지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 어인 호사다마인가. 몇 달 후 신부님과 올라가 보니 자리가 텅텅 비어 있고 공소 회장은 풀이 죽어 있다. 사정을 듣고 보니 화가 난다.
때는 자유당 말엽. 천주교는 야당이란 딱지 밑에 지서 순경이 들락날락. 공소 회장을 소환하고 집회를 감시한단다. 예비자 청년들을 선거의 3인조 9인조장으로 삼고 직접 간접으로 집회 방해가 심하단다. 겁 많은 순진한 시골 사람들은 행여 다칠세라 모두 흐트러버린 것이다. 화가 치민다. 곧장 신부님과 함께 짚차를 타고 달려갔다. 운전사에게 전속력으로 달렸다가 지서 앞에 급정지하게 했다. 차가 급히 서자 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가슴을 쑥 펴고 당당히 들어서서 지서장을 찾았다. 눈치 빠른 지서장의 태도가 공손하기 짝이 없다.
신부님께서 권하는 의자에 앉으시자 서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지금까지의 공소 사정과 사건 경위를 설명하고 나서 『대한민국에 신앙 자유 있습니까 없습니까? 당신의 직접 지시라 생각치는 않으나 당신 부하들의 잘못이므로 당신에게 책임 있습니다.
만약 시정되지 않는다면 상부에 항의하겠습니다』논리정연하게 꾸짖으신다.
그러자 잘못했노라 굽실거리며 연신 사죄한다.
강하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과잉충성의 얼간이 근성에 매스꺼워졌다.
그러나 그 후에도 뒷압력이 무서워 예비자가 나오기를 꺼려 모처럼 붙은 불이 잘 타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몇 달 후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어 그곳 사정을 모르게 되었으나 공소 회장이셨던 배암브로시오씨의 열성은 잊혀지지 않는다.
배 회장은 구호 양곡을 나누어 주기 위해 그곳 5개 면에 나가면 돌아올 수 없어 배급 준 면사무소 숙직실에 하루씩 신세를 지게 된다. 올라갈 때마다 반드시 만사를 제쳐놓고 그분이 따라 나서서 하루 종일 밀가루를 덮어쓰면서 저울눈을 봐 주시고는 일이 끝날 저녁이면 으레 교리서를 펴 들고 설명을 요구하신다. 그 진지한 열성에 감복하여 정성껏 가르쳐 드렸다.
그 과묵하고 겸손한 태도가 훗날 시장가에 큰 공소를 세우게 된 씨가 되었으리라 믿고 싶다.
그런데 그분의 열성이 지나쳐 한 해 농사를 몽땅 망칠 뻔한 일이 있었다.
때는 한창 벼 못자리를 할 시기. 모판에 씨를 뿌려 놓은 며칠 후 배급날이 되었다. 이 양반 『신선 노름에 도끼 자루 썩는다』는 격으로 예와 같이 따라 나섰다가 3일 후에 집에 돌아와보니 그동안 강풍이 불어 겨우 뿌리를 내린 볍씨가 모두 뒤집혀 버렸단다. 이것을 이곳에서는 홑이불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를 어쩌랴. 일 년 농사가 허사 직전이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그해에는 이웃에 모가 남아돌아 이집저집 동냥하여 겨우 다 심어 놓았단다.
새옹지마인가? 그럭저럭 심어놓은 것이 폭우가 심하게 쏟아져서 산사태가 일어나고 제방이 무너져 이웃논은 심한 피해를 입었는데 이분의 것은 단 한 포기도 상하지 않고 대풍이었다고 한다.
두 번 다시 흉내낼 일은 못 되지만 이쯤의 열성이면 반드시 갚아주시지 않으시랴 싶어 웃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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